Babette’s Feast
“Babette’s Feast(바베트의 만찬)
영화에서 프랑스 여인 바베트가 이웃에게 나눈 것은
고급 식재료로 차린 화려한 만찬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전 재산이었고,
이웃에 대한 고마움과 존경의 표현이었다.
음식을 먹는 사람들은
평생 처음 경험하는 맛과 수준에 감동하며
거의 종교적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신의 축복 없이는 결코 만들어질 수 없는 음식처럼.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거슨 ‘잘 먹기’다.
먹고 마신다는 행위는 평생 반복되는 일상이다.
여기에서 높은 만족도를 추구할수록 행복의 밀도가 높은 인생이 된다.
잘 먹는다고 해서 맛집을 찾아다니거나 미슐랭 레스토랑을 다닌다는 건 아니다. 각종 플랫폼에서 추천하는 집들은 막상 가 보면 대개 실망스럽더라.
내가 생각하는 잘 먹기는 신선한 재료로 해 먹는 간단한 집밥이다. 밥과 국, 반찬을 모두 갖추는 것보다
신선한 샐러드와 갓 구운 고기 몇 그람.
비타민과 단백질이 균형을 이루는 식단.
강한 소스나 양념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원재료의 맛을 느끼기 어렵게 하고
미각을 마비시키는 강렬함을
나는 ‘맛있다’고 부를 수 없다.
외식할 때 가장 싫어하는 곳은 호텔 뷔페다.
회식으로 가면 샐러드와 해산물, 과일 정도만 먹는다.
본전은 못 뽑지만 어쩔 수 없다. 선택권이 없는 회식 같은 상황에서는 이것이 최선의 매뉴얼.
나는 위가 1/3 찼다 싶으면 수저를 내려놓는다.
위장을 혹사시키지 않는다.
살짝 여유 있을 때 본식을 멈추고
차 한 잔으로 마무리하는 게 훨씬 속이 편하다.
작은 이해득실에는 예민하면서
정작 자기 몸은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이 많다.
아깝다거나 맛있다는 이유로 양을 줄이지 않는 습관은
40대부터 성인병으로 돌아온다.
대표적인 게 혈당, 콜레스테롤.
나는 편의점에서는 맥주만 산다.
먹을 것은 1년에 한두 번 사는 정도.
(디저트는 예외)
인스턴트 음식으로 한 끼를 ‘때운다’는 개념은 안된다.
한 끼 한 끼가 소중하다.
정말 좋아하는 음식,
먹고 싶은 음식을
가성비 좋게 골라 먹는다.
부담스럽다면 횟수를 줄여서라도
마음껏 먹는다.
식사는 생명을 불어넣고 유지하는 의식이다.
기도까지는 아니어도
나는 신성한 시간으로 여긴다.
식사 중 TV나 휴대폰을 보지 않는다.
정신은 온통 딴 데 팔려 있고
기계적으로 씹기만 하는 사람의 표정을 본 적 있는가?
짐승조차도 먹을 것 앞에서
그렇게 영혼 없는 표정으로 먹지는 않는다.
입안에 들어온 음식의 식감과 질감,
혀에 닿는 맛, 위로 내려가는 감각을
온전히 느끼며 먹는다.
그런 감각이 충족되면
먹는 양은 저절로 제 자리를 찾는다.
음식을 담는 그릇과 커트러리, 플레이팅도 중요하다.
일본에서는 아이가 스스로 밥을 먹을 나이가 되면
전용 그릇과 젓가락 세트를 갖춰 준다. 그것을 마이하시(나만의 젓가락)이라고 한다. 가족이라도 식기류를 섞지 않고 개인의 취향대로 갖춰 먹는다는 개념이 아주 마음에 든다.
훌륭한 플레이팅을 한다고
에르메스 그릇을 살 필요는 없다.
내 전용 그릇과 젓가락만 사수해도 된다.
차리는 것도 설거지하는 것도 귀찮다고
냄비째 놓고 먹지는 않는다.
먹는 내내 그릇을 보는데
기왕이면 눈도 즐거워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게 귀찮다면
도대체 무엇에 에너지를 쏟고 산단 말인가.
소울푸드
마음이 지치고 의욕이 사라지고
입맛마저 없을 때,
나는 따뜻한 곰탕 한 그릇이 생각난다.
맑은 국물에 퍼진 쌀맛
새콤한 깍두기.
부동산을 공부하던 초창기,
주말이면 동네를 정해 혼자 답사를 다녔다.
서울에서 나고 자랐지만 아는 동네만 알지, 모르는 곳이 더 많았다.
아침 일찍 낯선 동네에 도착하면
영업 중인 식당이 거의 없는데
국밥집은 언제나 문을 열고 있었다.
선택의 여지도 없고,
걷다 보면 금방 배는 고프고.
혼자 국밥 한 그릇을 먹고
“이제 출발~”
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나의 어설픈 열정과 시행착오,
흑역사 중의 흑역사의 한 페이지에
언제나 ‘따뜻한 국밥’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