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L126. COLD STELLA

One More Cup of Coffee

by Mira

나는 고소한 볶는 냄새에

살짝 산미가 도는 커피를 좋아한다.


원산지를 따지며 마시는 편은 아니지만,

어쩌다 입에 딱 맞는 커피를 마시면

오래전 헤어진 애인을

우연히 다시 만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내가 정말 커피 맛을 알게 된 건 일본에서였다.

출장을 다니다 보면 하루에도 몇 번씩 커피를 마시게 된다.

뜨거운 김에서 올라오는 산미의 향에 놀랐고,

혀에 감도는 쌉싸름한 맛에 또 한 번 놀랐다.

늘 마시던 커피의 고소함과는 다른 레이어가 있었다.


에스프레소의 진가를 알게 된 건 파리에서였다.

시차 적응에 지쳐 있을 때 마신 리스프레소 한 잔은

카페인의 위력을 제대로 보여주었다.


나는 불면증이 있고 카페인에 약한 체질이다.

그래서 커피를 마시면 카페인의 농도를 금방 감별할 수 있다.

드립커피나 머신으로 내리는 일반 커피는

몇 잔을 마셔도 잠드는 데 큰 문제가 없다.

하지만 에스프레소를 마신 날은 잠을 포기해야 한다.


한 손에 든 커피는 직장인의 멋을 위한 시그니처가 아니다. 매일 카페인을 마셔서라도 일해야 하는,

노동자의 생존음료다.


주말 이틀 동안은 가급적 커피를 마시지 않는다.

머리가 생생 돌아가지 않아도 되는 루즈함,

그것이 주말의 매력이다.

굳이 카페인 수혈을 할 필요가 없다.


대신 따뜻한 허브티를 마신다.

나는 프랑스의 쿠스미티를 좋아한다.

이 차로 허브티에 입문했을 땐

그 특별함을 잘 알지 못했다.


그러다 싸구려 향이 나는 허브티를 마신 후에야

쿠스미티가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부드러운 차맛이 무엇인지,

잔잔하고 깊게 남는 허브향이 무엇인지,

그때 제대로 알게 되었다.


내 인생에서 빠질 수 없는 게 맥주다.

대학 때까지는 술을 입에도 못 댔다.

제정신으로 놀기도 바쁜데, 술까지 마실 시간이 어딨나?


아빠 사업이 망했지만, 이전부터 계획했던 대학원 진학을 무리해서라도 해버렸다.


지금 생각하면 괜한 고집인데, 그때는 그것마저 놓치면 버티기 힘들 것만 같았다.

부모님 지원은 기대할 수 없으니 늘 돈이 궁했다.


여름방학 내내 아르바이트했다.

여의도 디자인 회사에서 9시부터 6시,

밤에는 홍대잡지 편집디자인을 하면서 새벽까지.

낮엔 웹디자인, 밤엔 잡지 편집.

새벽엔 찜질방.


겨우 다음 학기 등록금을 만들었다.

통장에 돈이 찍힌 걸 확인하고

스무 시간쯤 기절하듯 잤다.


거기서 끝났으면,

보람 있는 여름방학 에피소드였을 거다.


하지만 잡지가 발간되고 나서 오류가 속출했다.

기사와 사진이 엉키고, 제목은 제멋대로였다.


모두 내 실수였다.

결국 아르바이트 비용도 못 받았다.

할 말이 없었다.

억울하지도 않았다.

내 잘못이니까.


나는 원래 반복적인 일을 하는 게 어렵다.

브런치 글 넘버링을 틀리거나,

저장 대신 발행 버튼을 눌러버리거나.

아직도 똑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아휴.


밤에 잠이 안 왔다.

내일 할 일은 산더미인데

눈은 말똥말똥.


대학 시절, 맥주 몇 모금에 알딸딸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맥주를 마시면 잠이 오려나?’


그게 시작이었다.

나의 맥주 사랑은.


한동안은 BECK만 마셨다.

바디감, 청량감, 씁쓰름한 끝맛.

딱 좋았다.

게다가 4캔에 만 원.

부담 없는 가격.


지금은 스텔라 아르투아에 정착했다.

하이네켄, 칭다오, 기린에서 아쉬운 무언가를 스텔라가 채워준다.


노동자들이 퇴근 후 버드와이저를 마시듯이

나도 하루 종일 뇌를 풀가동하고

피로가 끝까지 차오른 상태에서 퇴근하면 차가운 맥주 한 모금이 간절하다.


샤워를 하고 나와, 로브차림으로

스텔라 한 모금과 유튜브를 켠다.


한 모금.

알코올이 싸악 퍼진다.

뜨겁게 달궈진 뇌가

서서히 식어간다.


몸과 머리가 전원을 끄고,

다른 세계로 넘어가는

휴식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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