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L128. 극내향형대문자볼드 I

노매너 인간과 거리두기

by Mira

나는 사교적인 성격이 아니다.

누구에게 먼저 말을 걸거나 식사를 하자고 하지 못한다. 상대가 청하면 기다렸다는 듯 반응은 해도.


학교 때도 먼저 다가와 친구 하자는 애들하고만 다녔다. 내가 누구에게 먼저 다가서는 일은 없었다. 그러니 사회생활하면서 인간관계가 편했을 리가 없다.


나의 그런 마이너 한 성향이 사회생활에서 걸림돌이라는 건 누구보다 내가 잘 알았다.

회식에서 사람들과 웃고 떠는 시간은 나에게 고역이었다. 어떤 동료들은 회식 때문에 회사 다닌다고 할 정도로 좋아했지만, 나는 그 시간을 견디기 힘들었다.


저녁회식문화가 사라진 요즘은 회사생활의 무게감을 거의 느끼지 못할 정도로 가벼운 마음으로 출근한다.


사람들과의 스몰토크에서도 할 말이 별로 없었다.

메인 관심사가 너무 달랐다.

결혼생활, 남편과 아이 양육.

내가 그런 걸 알 리가 있나.


나의 그런 성격이 드라마틱하게 바뀐 건 여행을 통해서였다.

‘아쉬운 놈이 우물 판다’는 말이 딱 맞았다.

온통 아쉬운 것 투성이었으니, 남들에게 자연스럽게 말 거는 법부터 배워야 했다.


기왕 나를 도와주는 거, 기분 좋은 마음으로 도와주길 바랐다.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진심을 말하면 어느 나라에서나 웬만해서는 다 통했다.


그런데 수많은 사람 중에서 누구에게 도움을 청하느냐? 그건 거의 동물적인 감각을 집중해야 했다.

느끼한 놈,

사기꾼 냄새가 나는 놈,

양아치를 걸러내고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아야 했다.


도움을 청한다는 게 대부분 길을 묻거나, 숙소를 확인하거나, 무거운 걸 옮기는 일 정도였다. 나는 아이폰이 없던 시절, 지도 하나 들고 유럽을 다닌 여자.


낯선 유럽, 동양 여자애는 철저히 이상한 사람에게는 곁을 주면 안 된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엉뚱한 일을 만들 수도 있었다.


여행의 낭만이 영화나 소설에서 얼마나 그럴듯하게 포장된 것인지, 온몸으로 경험했다.


낭만이고 뭐고, 안전이 제일 중요했다.


오픈 마인드도 아무에게나 주는 게 아니다.

그 마인드가 통하는 사람과 주고받아야 한다.

나의 지갑이나 여권, 핸드폰을 노리는 놈에게는

모조리 클로징.


그래도 일상으로 돌아와,

매일 만나는 친구나 회사 동료들과의 관계는 쉽지만은 않았다.


이만큼 나이가 들어서

‘관계’에 있어서 후회되는 게 딱 하나 있다.


그럴 가치가 없는 사람에게

너무 마음을 주고 혼자 상처받는 일.


상대가 애인이든 가족이든 친구든, 회사 동료든 마찬가지다.

나에게 무례하게 하거나 선을 넘어도,

우물쭈물 넘어가며 이어온 관계는

어차피 관계로서 의미조차 없었다.

나이가 들 수록 이 기준으로 가족을 바라보니, 내 노후는 더욱 쓸쓸하겠구나 싶다.


나는 타인의 실수에 대해서는 웬만하면 넘어간다. 나도 엉뚱한 실수를 많이 하는 허당이라 뭐라고 할 자격이 없다.


웬만한 이기심이나 이해득실에서의 계산도 그냥 웃고 넘기고 내가 좀 손해 봐도 된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본성이니까.

때로는 그 머리 굴리는 소리마저 귀엽게 들린다.


그런데 이제 절대 참지 않는 게 있다.

바로, 친하다는 이유로 나에게 무례하게 굴거나

선을 넘는 것.


그럴 땐 차가운 표정으로 단호히 경고한다.


그것도 딱 한 번.

왜냐하면 두 번 말하면 잔소리가 되고

말에 힘이 없어지니까.


내 경고를 알아듣지 못하고

같은 일을 반복한다면 바로 손절.


매너를 모르는 사람을

굳이 가까이 둘 이유는 없다.


특히 나이가 10년, 혹은 그 이상 차이가 나는 회사 후배들과의 관계는 쉽지 않다. 관계랄 것도 없이 인사나 하면 다행이고, 정말 서로 씹는 그런 분위기.

그럼에도 가까이 지내는 몇몇을 소중히 여기는데, 그 기준은 변함이 없다.


내가 생각하는 매너는 이렇다.

예를 들어, 한참 어린 막내 후배와 점심 약속이 있다고 하자. 그런데 아침에 상사가 갑자기 점심을 먹자고 한다.


내 상식과 감각으로는, 이렇게 한다.

“선약이 있다. 다른 날로 하시죠.”

아무리 막내라도, 그 아이와의 약속을 1순위로 지킨다.


그런데 회사에서 이렇게 행동하는 사람은 나뿐이다.

상사가 부르면, 그 직급 이하의 사람과의 약속은 언제든 깨버린다.

더 놀라운 건,

그런 이유를 대면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고, 오히려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인다는 것.


나는 정말, 문화적 충격이었다.


회사에서는,

적당히 소셜만 하면 된다.

굳이 진심으로 서로를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는—

그런 약속을 나 몰래 따로 맺기라도 했나.


이런 기준으로 사람을 가리다 보니

곁에 남아나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지.


외롭긴 하다.

혼자 밥 먹는 날도 있다.


그런데 경험해 보니,

내 감각을 누르고 억지로 어울려 봐야

어차피 내 사람이 되지는 않는다.


20년 가까이 일한 회사를 떠나면,

과연 나와 연락하며 인연을 이어갈 사람이

몇이나 될까?


조용한 사무실에서 동료들을 둘러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글쎄.

한 명? 두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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