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트리 매뉴얼
사무실 책상에 중독된 머리
나는 회사 내 책상에 앉아야만 머리에 전원 버튼이 켜진다.
주말에는 해변의 낙지처럼 늘어져 있다가도, 월요일 아침 책상 앞에 앉으면 다시 가동된다.
이런 말을 하는 나도 믿기 어렵지만,
30년쯤 직장 생활을 하다 보니 월요병도 자연 치유되더라.
심지어 일요일 오후가 되면 ‘쉬는 상태’가 어색해서 월요일이 기다려지기도 한다.
후배들에게 이 말을 했더니, 절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나를 쳐다봤다.
말했잖아, 나도 믿기지 않는다니까.
어릴 적 뉴스에서 본 퇴직자의 하루가 떠오른다.
가족에게 퇴직 사실을 말하지 못하고, 여느 날처럼 출근하는 척 집을 나선다.
도서관이나 산, 공원에서 시간을 보내다 퇴근 시간에 맞춰 집으로 돌아가는 생활.
그때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제는 알겠다.
출근이 사라진 하루가 얼마나 길고 무겁게 덮쳐 오는지.
정말 나한테는 해당 없을 것 같던 아저씨들의 삶이, 어느새 코앞에 닥쳤다.
Guilty-Free 게으름
코로나 때 재택근무가 나는 더 힘들었다.
눈곱만 떼고 노트북을 켰는데, 머리는 멍했다.
일을 한 것도 아니고 안 한 것도 아닌 흐리멍덩한 하루를 보내는 게 싫었다.
그래서 주말이나 긴 연휴에는 일부러 퇴직했다고 가정해 봤다.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낼래?’
마음은 카페로 달려가 뭔가라도 하고 싶었지만, 동시에 “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내 출근을 체크하는 것도 아닌데.
결국 빈둥대다 하루가 갔다.
그리고 마음 깊은 곳에서 죄책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Killing Me Softly
돈만큼 다루기 어려운 것이 시간이다.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킬링타임’이라는 말을 쓰지만, 나는 들을 때마다 의아하다.
시간을 죽이다니. 얼마나 허술하게 살아야 그런 말을 할 수 있나.
그런데 정작 무한한 자유 시간이 주어지면, 나 역시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하고 싶은 일, 해야만 하는 일을 머릿속에서 시끄럽게 굴리다가, 결국 손 하나 까딱 안 하고 보낸 주말이 얼마나 많았는지.
침대에 누워 휴대폰만 들여다보다 하루를 끝내고 나면, 나 자신에 대한 감정이 불쾌해진다.
그래서 주말의 룰을 정했다.
이것저것 거창한 계획 대신, 딱 세 가지.
1. 잠 깨면 바로 샤워하기
헤어트리트먼트를 하고 샤워하면서 욕실 청소까지 한다. 물때가 끼는 구석구석을 닦아내면 기분이 리셋된다.
2. 샤워 후 바로 마스크팩
팩을 붙인 채로 주말 옷장을 정리한다. 주중에 입었던 옷을 치우면서 자연스럽게 다음 주 옷차림까지 세팅한다.
외모 관리는 죽을 때까지 해야 한다고 생각은 하지만, 무한 반복되는 일상에 자꾸 루즈해진다.
주말마다 옷장을 조금씩 정리하니까 대정리의 날을 따로 잡지 않아도, 정돈된 옷장이 아침 출근 시간을 절약해 준다.
3. 무조건 스타벅스
약속이 있건 없건 노트북을 챙겨 집 앞 카페에 간다.
글을 써서가 아니라,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지면 주말이 뿌듯하다.
반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흘려보낸 주말 뒤에 맞이하는 월요일은 늘 우울했다.
의외로 1번, 2번은 잘 지켰다.
역시 문제는 3번이었다.
나는 핸드폰으로 주로 유튜브를 보는데, 킬링타임이 안 되도록 나만의 테마를 정해 본다.
내가 좋아하는 역사, 경제 테마를 이어서 보다 보면 나도 모르게 내 안에 지식이 쌓이는 걸 느낀다.
비록 시청하다 잠들어도, 다시 이어서 듣는다.
이번 주말에는 영국과 프랑스의 시위 현장, IMF의 경고, 국가 신용등급 하락에 대한 영상을 봤다.
보통 주식 포트폴리오의 미들 센터 역할로 유럽 주식을 추천하곤 하지만, 나는 회의적이다.
내가 10대 시절에도 “유럽은 해가 지는 중”이라는 말이 있었는데, 무려 40년이 흐른 지금도 유럽의 해는 좀처럼 떠오르지 않는다.
반전의 동력도 딱히 보이지 않는다.
헨리 8세 시절, 스페인과 프랑스 사이에서 고전하던 작은 섬나라 영국.
그토록 원하던 아들을 얻지 못한 채, 결국 스스로 처형했던 앤 볼린의 딸 엘리자베스가 왕위에 올랐다.
그녀가 영국을 대영제국으로 만든 건 기적에 가까운 반전이었다.
어떤 작가라도 이런 극적인 전환을 허구로 쓰기는 힘들 것이다.
역사가 픽션보다 더 픽션 같아 언제나 흥미진진하다.
나는 월요일마다 주말에 본 유튜브나 넷플릭스 영화를 짧게라도 코멘트로 정리한다.
글로 남기다 보면 머릿속이 명료해지고, 그 글들이 쌓이면 나만의 아카이브가 된다.
타임트리 매뉴얼
이제는 퇴직 후의 시간을 다룰 방법도 구체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닥쳐서 해도 된다? 음, 막상 닥쳐서 해야 할 때 허둥대고 헤매는 내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우울하다.
미래를 준비하는 것 같지만, 동시에 현재를 즐겁게 보내는 방법이기도 하다.
1. 즐기는 시간
글쓰기, 그림, 어릴 때부터 좋아하던 일을 매일 하며 소박한 창작의 즐거움을 이어가고 싶다.
2. 운동하는 시간
요가나 수영처럼 혼자 꾸준히 할 수 있는 운동을 루틴으로 삼고 싶다.
3. 봉사하는 시간
동물 보호 단체에 후원만이 아니라, 직접 가서 아이들을 돌보고 싶다.
단단한 머니트리의 구조 위에, 시간을 어떻게 쓸 것인지 타임트리도 미리 훈련해야 한다.
시간을 죽이지 않고,
시간을 키우는 법.
오늘의 노동요
Miles Davis — December 22, 1965
Plugged Nickel Club, Chicago
https://youtu.be/MOA56R2XWCU?si=Y7V1abKHLP8PfVj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