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관의 무게
대표이사, 첫인상
4년 전, 새로 부임한 대표이사 앞에서 프로젝트 발표를 진행했다. 주제는 뉴브랜드의 감성과 포지셔닝 그리고 디자인 전략
회의실 안,
디자이너들은 각자 슬라이드를 넘기며 안간힘을 쏟았다.
“나는 이렇게 크리에이티브하고 똑똑합니다!”
발표는 어느새 자기 PR 무대처럼 변해 있었다.
나는 조용히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이 내용을 그녀가 감각적으로 느낄까?
그녀는 이 디자인을 감성적으로 수용할 수 있을까?
60대에 접어든 그녀가 20대 소비자를 타깃으로 한 감성 스토리에 얼마나 공감할까?
그녀는 칭찬과 덕담으로 자리를 마무리했지만, 그 후 그 프로젝트는 비용 삭감으로 폐지되었다.
첫인상
그녀는 공채 사원 출신,
월급쟁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최고의 자리에 오른 사람이다. 또 여성 대표라는 프리미엄도 있었다.
여성 할당제에 대해서도 참 할 말이 많지만, 일단 패쓰.
내 눈에 그녀는.
화장품 회사를 이끄는 CEO라기보다, 부동산 사무소에서 볼 법한 소장님 스타일이었다. 나는 외면을 보고 사람을 생각한다.
상사의 옷차림과 표정으로 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오늘 바이오리듬이 좋군,
혹은 오늘은 영 컨디션이 안 좋군,
이럴 때는 보고할 일도 미룬다.
그녀의 발끝을 살폈다.
나는 회의할 때 상대의 눈과 표정만큼 탁자 아래 발 상태도 살핀다.
블랙 정키 로퍼.
목이 짧은 발목 양말 위로 드러나는 종아리.
그 시즌, 모든 브랜드가 두툼한 밑창과 과장된 디자인의 앞코에 장식을 단 로퍼를 쏟아냈다.
나는 미우미우, 프라다, 토즈를 돌며 신어 보고 패스했다. 한때의 유행이고 클래식함이 없었기 때문에 내 소비 기준에서는 아웃.
그런데 그 로퍼에
목이 짧은 발목 양말이라니.
아, 이런 감각의 대표가
과연 뷰티사업을 잘 이끌 수 있을까?
속으로 혼자 탄식했다.
기록적인 매출기록
그녀는 매출에만 몰두했다.
브랜드 포지셔닝도, 소비자 패턴의 변화도 난 몰라였다.
매출은 꾸준히 하락했고,
인센티브는 동결.
비용 절감이 반복되다가, 엉뚱한 곳에 돈이 퍼붓고.
직원들은 그녀를 비난했고,
그녀 가까이에서 아부만 하는 임원들을 증오했다.
결국 K-뷰티가 세계에서 유례없는 호황을 맞던 시기에, 회사의 영업매출은 전년 대비 70% 하락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주가는 최고점 대비 70~80% 빠졌다.
나는 궁금했다.
대표는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이런 스트레스를 어떻게 견딜까?
그녀의 스탠스는,
“나는 최선을 다했다.
그런데 밑에 애들이 따라주지 않는다.”
아, 이 사람은 끝났구나.
싶었다.
문제의 핵심
사람은 누구나 어려움에 부딪힌다.
운이 없어서, 능력이 부족해서, 혹은 상황이 나빠서.
솔루션을 찾는 건 문제 인식이다.
내가 더 노력해서 풀어야 할 문제인지,
아니면 포기하는 게 최선인지.
마음은 늘 달콤한 말로 숨을 공간을 만든다.
“네 잘못이 아니야.”
“넌 끝까지 할 수 있어.”
그런 마음은 언뜻 위로 같지만, 때로는 냉정한 판단을 흐린다. 꺾이지 않는 마음도 중요하지만 꺾어야 할 때를 아는 것도 중요하다.
인사이동
자기에게 토 달지 않는 사람은 임원 승진.
실무 경험 많고 자기 의견 내던 사람들은 모조리 강등.
그리고
한 달 뒤, 그녀는 해임되었다.
권력이라는 도파민
무한대의 권력을 가지면, 인간의 깊은 무의식이 드러난다. 그건 가장 고집스럽고, 가장 바보 같은 본성일지도 모른다.
만약 내가 그런 자리에 앉는다면?
사람들은 불가능의 도전에 열광하지만, 나는 안 되는 일에 매달리기엔 인생이 너무 짧다고 생각한다.
나는 30대에 팀장을 해보고 내가 리더 역량이 없다고 판단했다. 남의 일을 관리하는 것도 싫고,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도 싫다. 동물로 치면 이리저리 양을 모는 보더콜리 같은 재능이 없는 거지.
나는 딱 고양이처럼 늘어지게 자고 여유 있게 내 할 일 하는 게 좋다. 그러니 나 같은 사람은 사람은 리더를 안 하고, 못한다.
회사 생활하면서 스스로 리더 자리를 내놓고 실무 담당을 선택하는 사람을 몇 명 보았다. 상관도 없는 동료들은 수군거렸지만, 나는 참 현명한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무한대의 권력을 갖고 싶은 마음도 없고 그 왕관의 무게도 싫다. 그럴 역량도 안된다는 걸 잘 안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인 동시에 포기의 연속이기도 하다.
이것만큼은 포기 못해라는 마음까지 내려놓을 때, 신기하게도 자기 길을 찾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