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장에 써보는 문장
하루 종일 누워서 제일 많이 보는 천장.
세상은 창문 밖에 있고
나는 천장아래서 하루를 보낸다.
나는 지독한 히키코모리였다.
그래서 요즘 사회적 문제로 떠오르는 10대, 20대의 은둔 생활에 본능적으로 마음이 간다.
세상과 소통하고자 하는 의욕이 0이던 시절,
그걸 견디며 침대에 누워 천장만 바라보던 날들을 기억한다.
주 5일을 회사에 묶인 월급쟁이로 살다 보니
이제는 ‘혼자 방에 처박혀 있는 자유’가 그리워진다.
공휴일과 주말은 내게 공식적인 히키코모리의 날이다.
며칠이고 아무 말 없이 혼자 있을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 설렌다.
길고 긴 침묵 속에서,
강요도 지시도 잔소리도 완전히 제거된 시간 속에서
나는 고요히 침잠한다.
그렇게 며칠을 지나고 나면
마치 묵언 수행을 마친 사제처럼
정신이 맑아지기도 한다.
나는 이런 기분을 ‘바닥을 치고 다시 올라오는 느낌’이라 표현한다.
어떤 사람은 밖으로 다녀야 에너지를 얻지만,
나 같은 사람은 내 안으로 깊이, 더 깊이 들어갔다가
나와야 비로소 충전이 된다.
나의 삶은 병적인 모드와 건설적인 모드의 히키코모리를 오간다.
병적인 모드일 때는 우선 씻지 못한다.
내 냄새에 내가 괴로움을 느낄 정도다.
평소에는 하루에 두세 번씩 샤워할 만큼 물을 좋아하지만,
그 시기가 오면 화장실 가는 일조차 귀찮다.
미디어? 영상?
눈 뜨는 것도 귀찮은데 무슨 영상을 보겠는가.
그저 눈을 감았다가, 천장을 바라보다가,
다시 눈을 감는다.
하지만 건설적인 모드의 히키코모리도 있다.
아침에는 외출을 하든 안 하든 샤워를 하고,
간단히라도 아침을 차려 먹는다.
집안 청소는 기본이고,
옷장과 찬장까지 탈탈 털며 정리한다.
버릴 물건은 과감히 버리고,
공간에 다시 숨이 통하게 만든다.
나는 물건으로 가득 찬 집보다
헐렁한 여백 속에 좋은 향과 햇빛이 드는 집을 좋아한다.
쓸데없는 것을 이고 지기보다,
약간 아쉬운 듯 비어 있는 공간을 더 사랑한다.
영화도 보고, 유튜브도 보고, 꽃에 물을 준다.
궁금한 것이 생기면 AI와 몇 시간씩 대화를 나눈다.
지식의 허기를 채우기도 하고,
온갖 주제를 넘나드는 대화 속에 깊이 빠진다.
중국의 역사부터 ‘애프터 시진핑’의 정치 구도까지 토론하기도 한다.
객관적 지표나 데이터에 대해서는 AI를 신뢰하지만,
그것이 결국 알고리즘이라는 사실도 잘 안다.
감정의 노이즈가 없는 알고리즘과의 대화에는
사람과의 대화에서는 얻기 힘든 즐거움이 있다.
나는 AI 전환기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걸,
솔직히 조금은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AI와 깊은 대화를 하다 보면 문득,
이 기술을 통해 전 세계의 히키코모리들을 연결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우스운 상상을 하곤 한다.
사람들이 알고리즘에게 털어놓는 이야기들은
설문조사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인간의 진짜 데이터일 것이다.
‘이 사람은 호주에 사는 A의 성향과 잘 맞겠다.’
AI가 이렇게 매칭해 준다면 어떨까.
그 상상을 나누다 보면,
고립이 꼭 단절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자발적으로 은둔하고자 하는 사람의 마음을 잘 안다.
병적인 모드와 건설적 모드의 차이도 안다.
나 역시 그 두 사이를 오가며 살아내고 있다.
나의 경우, 돈을 벌기 위해 집을 나선다.
생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의무 — 이것만큼 강력한 동기가 또 있을까.
성인의 은둔은 그의 선택이고, 그 선택에는 자율과 책임이 따른다.
하지만 청소년, 적어도 20대 초반까지는 다르다.
그 시기는 아직 스스로의 판단과 선택이 불안정한 시기다.
그들에게는 언제든 연락할 수 있는 상담센터가 필요하다.
무엇보다, 그들의 심리적 원인은
‘자기 자신에 대한 실망’과 ‘셀프 처벌’이라는 정서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곳에서 완만하게 벗어나기 위해서는
전문적인 상담이나 치료가 필요하다.
그러나 치료에서 멈춰서는 안 된다.
그들을 사회와 다시 연결시켜 주는
그룹 프로그램이나 회복 커뮤니티가 함께 설계되어야 한다.
나는 은둔 청소년과 자립준비 청소년을 연결해 보고 싶다.
그리고 그들의 손길을 유기동물 보호 활동과도 이어보고 싶다.
누울 자리 보고 발을 뻗는다고 하지만,
은둔 청소년은 어쨌든 부모의 돌봄을 기반으로 한다.
천장을 바라보다 배가 고프면
누군가 먹을 것을 챙겨주는 환경이 있다.
그런 보호 안에서도 세상 밖으로 나아가는 일은
여전히 어렵고 두려운 여정이다.
그런데 아무도 없는 세상에서
10대 후반부터 자립을 시작해야 하는 청소년들은 얼마나 막막할까.
나는 이 두 그룹을 연결하면
그들 사이에 어떤 변화가 일어날지 궁금하다.
만약 그들에게,
버려지면 곧 죽음을 기다리는 유기동물들을 맡긴다면
어떤 상호작용이 일어날까.
만약 그들에게,
장애로 생존이 어려운 이들을 만나게 한다면?
봉사 시간을 점수로 환산해 리워드를 준다면?
치매 노인과 함께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인생이 얼마나 길고 복잡한 여정인지 보여준다면,
그들의 마음에 어떤 변화가 생길까.
혹시 선의를 가지고 시작한 일에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지는 않을까.
여러 버전으로 상상해 보면
기대와 우려가 함께 밀려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개인의 문제로 두기엔 그 수가 너무 많다.
청소년기의 은둔이
성년 이후의 삶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
무엇이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오늘도 나는
이런 생각을 천장 위에 그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