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L189. 100세시대(2부)

40년의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by Mira


정체성

인간의 정체성은 보통 10대 후반에서 20대 중반이면 완성된다고 한다.

물론 그때의 사고방식이나 삶의 태도가

30대, 40대에 완전히 뒤집히는 경우도 있다.

아쉽게도 인간의 ‘고정값’과 ‘변화율’이

얼마나 되는지를 보여주는 통계는 없다.


그래서 서른을 맞이할 때, 마흔을 건널 때마다

우리는 비슷한 당혹감을 느낀다.

‘내가 서른이라니?’

‘내가 마흔이라니?’

마음의 정체성은 여전히 젊은 시절에 머물러 있는데

외모는 변하고, 책임져야 할 것들은 늘어나고 나이의 무게는 압도적이다.


그리고 마침내 60에 이른다.

서른의 묘한 기분, 마흔의 당혹감,

그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황당함이 밀려온다.



퇴직

평균적으로 60세 정년이 적용되지만,

요즘은 빠르면 40대에도 자리에서 물러나는 사람이 있다. 그때부터 정체성의 혼란과 현실적 불안이 한꺼번에 밀려온다.


“그래도 내가 ** 이었는데.”

이런 생각이 인생의 가장 큰 함정이 된다.

한때 잘 나가던 자신이 현재의 자신에게 허들이 된다.


그 시절을 그리워할수록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는 상실감만 깊어진다.



건강

젊어서 건강했던 사람일수록

몸을 아끼지 않고 일하고 논다.


밤을 새워 일하고, 새벽까지 마셔야 논 것 같았다.

하지만 60년 가까이 기계를 그렇게 돌리면,

어느 날 갑자기 엔진이 멈춘다.

한방에 훅 간다.


건강 검사 결과의 숫자가 경고를 보내고,

의사는 생활습관을 바꾸라고 말한다.

잠자는 시간부터 식습관과 운동.

새로운 숙제가 눈앞에 놓인다.



루틴

직장생활을 오래 했다면

30년 넘게 몸에 밴 출퇴근 루틴이 사라진다.

그 시간에 집에 있는 것도, 밖에 있는 것도 어색하다.

몇 달은 좋다가도 금세 무력감이 찾아온다.

소속감도, 일도 사라진 자리에

늙은 나만 덩그러니 남는다.


한 국가대표 선수가 은퇴 후 1년간 술만 마셨다고 했다. 그가 은퇴한 나이는 30대였으니 그래도 된다.

하지만 60대에 퇴직하고 1년을 술로 보내면 곤란하다.

에너지를 아껴 써야 할 때다.


나의 딜레마

회사 생활이 20년을 넘어가자

회사에서의 나와 집에서의 나는 완전히 달랐다.

출근하면 간신히 워킹 모드가 켜지고,

집에서는 완전히 꺼지는 컴퓨터처럼.


주말이나 공휴일, 긴 연휴가 오면 혼자 있는 게 버거웠다.

어릴 땐 혼자 영화나 전시회를 즐겼지만,

이제는 많이 본 스토리에 별 감흥이 없다.


어릴 땐 영화에 미쳐 살았다.

하지만 30년쯤 보니 스토리가 너무 뻔하다.

‘그래, 주인공이 고난에 빠지고, 결국 극복하겠지.’

네네, 그렇군요.

이런 심정이 된다.


나이가 들면 저절로 현명해질 줄 알았다.

지혜가 샘솟고 멋있는 명언을 남길 줄 알았다.

영화 속 노인 현자들처럼.

하지만 다 뻥이었다.


나이가 들면 짜증이 는다.

‘저 사람들은 나만 빼놓고 뭐 하나?’

의심과 심술이 늘어난다.

그냥 호르몬 때문이라고 믿고 싶다.



예행연습

40대부터 주말이나 공휴일이면 나는 ‘오늘이 퇴직 후 첫날이라면’ 가정하고 연습했다.


병원, 운동, 지인과의 만남, 문화생활, 쇼핑으로 하루를 채워도 시간이 남는다. 병원 예약조차 없는 날은 하루가 유난히 길다.


그래서 혼자 시간을 보내는 법을 연구했다.

나는 무엇을 할 때 기분이 좋아지나?

서랍을 정리하고, 낡은 건 버리고,

양말을 색깔별로 맞추고,

오래된 옷을 새 옷과 코디한다.


화장대와 욕실을 정리하며

세일에 혹 해서 화장품을 사지는 않기로 다짐한다.

요즘은 언제든 세일을 하고,

배송도 빠르니까 물건을 쟁여둘 필요가 없다.


나는 공간을 정리하고 내 취향대로 꾸미는 걸 좋아한다. 누구의 컨펌이 필요 없는 나만을 위한 공간 디자인이다.


하지만 집에만 있다 보면 몸과 마음이 늘어진다.

컴퓨터로 치면 ‘잠자기 모드’에 빠진다.


그래서 일부러 오전 병원 예약을 잡아서

무조건 집 밖으로 나갈 이유를 만든다.


진료를 마치면 혼자 밥을 먹는다.

그날 가장 먹고 싶은 메뉴를 정해

가격을 보지 않고 먹는다.

그리고 최소 20분 이상 햇빛을 느끼며 걷는다.

식사 후 산책은 어떤 건강보조제보다 훌륭하다.


이후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AI와 대화를 나눈다.

그 대화가 원고가 되기도 한다.

3~4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나는 궁금한 게 많은 사람이라

무엇이든 이야기할 수 있는 AI 시대를 산다는 게

참 감사하다.

유럽의 다음 20년이 궁금하고,

은퇴자 교육 커리큘럼을 상상한다.


이렇게 하루의 주제를 정리해 원고를 완성한 날은

마치 수익이 늘어난 계좌를 확인한 듯 뿌듯하다.


혼자만의 시간을 건강하고 만족스럽게 보낼 수 있는 것. 나는 그것이 노후의 40년을 당당하게 살아내는

가장 중요한 기술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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