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L204. 나의 경력은 어디로?

일의 기쁨과 슬픔

by Mira


1. 내 경력은 어디로 이어질까


회사에서 일하는 동안, 내 작은 머릿속에서 오래 살았던 한 문장이 있다.

“지금 이 경험이, 나의 다음 커리어에 어떤 도움이 될까?”


이 질문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게 아니다.

출근 카드만 찍으면 ‘프로’가 되고,

월급만 받으면 ‘성장’했다고 위안할 수 있었던 어느 시절이 지나자 자연스럽게 생겨난 감정이었다.


사람은 가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너무 잘 알아버려서 슬퍼지기도 한다.


오래 일하면 경력이 쌓이고,

그 경력은 다음 인생의 문을 열어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친절하게 설계되지 않았다.

그 믿음은 종종 한 번의 조직 개편,

한 번의 연말 평가 앞에서

무지성으로 무너지는,

나약한 신화에 불과했다.




2. 회사의 언어는 회사 안에서만 통한다


회사에서 내가 ‘유능하다’고 인정받았던 많은 순간들.

그 능력은 놀랍게도

대부분 회사라는 작은 생태계 안에서만 유효했다.


보고서의 문장 길이,

회의에서 언제 침묵해야 하는지에 대한 촉,

부서 간 온도를 미세하게 맞추는 솜씨.

이런 것들은 회사 밖으로 나오면

마치 바닷물 속에서만 예쁘게 펄럭이는 해파리처럼

갑자기 쓸모를 잃는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30년 동안 배운 이 방식이, 회사 밖에서는 어떤 가치가 있을까?”

그 질문이 던져주는 서늘함은,

아무리 따뜻한 조명 아래 있어도 금세 식지 않는다.




3. 지옥철을 피하고 싶었어


일은 나를 성장시키는 동시에,

아주 성실하게 소모시키기도 한다.

그리고 그 소모는 늘

출근길에서 가장 도발적으로 드러났다.


한동안 나는 서울 지하철,

2호선과 3호선을

동서로 가르는 출근을 했다.

밀려드는 사람들,

서로의 체온이 너무나 가깝게 겹치는 불쾌함,

심지어 호흡까지 공유되는 기분.

삶을 빼앗기고 있다는 느낌이 가장 진하게 들던 시간이었다.


나의 솔루션이 있었다.

출근 시간을 1~2시간 앞당기는 루틴.


아무도 없는 새벽 지하철.

그 시간에 퇴근하는 초라한 행색의 야간 근로자들.

지하철에서 책을 읽는 재미

카페에서 먹는 모닝 샌드위치.

조용한 사무실에서의 사소한 기쁨.

영어 회화 전화로 잃어버린 언어에 발 돋음 하는 시간.


이 루틴은

회사가 나를 삼키기 전에

내가 먼저 나를 지키는 방식이었다.


나는 비로소

회사 속의 나와 회사 밖의 나를

다른 사람처럼 구분해낼 수 있었다.



4. 커리어의 단절


직장에서의 경력은

다음 커리어로 자연스럽게 이어지지 않는다.

특히 오래 일한 사람일수록

그 사실을 인정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기술직은 기술이 남고,

전문직은 자격이 남는다.

그러나 많은 일들은

회사라는 무대에서만 의미가 있고

막이 내리면 흔적처럼 사라진다.


요즘은 기술직조차

기술 업데이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현장에서 도태되기도 한다.

누군가는 이것을 시대의 잔혹함이라 부르겠지만

사실 삶은 늘 이런 식으로 흘렀다.

기술의 진보와 혜택을 누리는 현대인으로서는 불평하기에는 좀 민망하다..


“이렇게 오래 일했는데, 왜 이 경험이 다른 곳에서는 유효하지 않을까?”


그리고 그 질문 끝에서

꽤 단정한 사실 하나를 발견했다.

대체 가능한 노동일수록 낮게 평가된다.

그렇다면 남는 질문은 하나뿐이다.

대체될 수 없는 나만의 일은 무엇인가?


회사는 분기마다 KPI로 나를 평가했지만

그건 나에게 별 의미가 없었다.

나는 이미

‘대체되지 않을 노동’을 찾기 위한

나만의 KPI를

매일 수행하고 있었으니까.



5. 내게 남은 것들


회사에서 견디며 배운 모든 것들은

기술보다 오래 버티는 성질을 가진다.


문제를 빠르게 파악하는 사고의 구조,

사람을 대하는 내성,

감정의 파도 속에서도

일상을 유지하는 근력.

이런 것들은 이력서에 적을 칸이 없지만

퇴직 이후에 더 필요한 힘이다.


30년의 일은

다음 커리어로 ‘직결’되지 않을 뿐이다.

그러나 다음 인생을

지탱하는 기초 체력으로 바뀔 수는 있다.


알랭 드 보통이었다면

아마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일은 가끔 우리를 배신하지만,

그 배신이야말로 우리가 진짜 원하는 삶으로 데려다준다.”



6. 커리어 리빌딩


초년생 시절의 나는

경력이 경력을 낳고,

일이 다음 일을 데려올 것이라고 믿었다.


커리어는 이어지는 게 아니라, 다시 만들어지는 것이다.

직장은 나를 만들어주지 않고,

퇴직이 나를 파괴하지도 않는다.

둘은 그저

내가 어떤 인간인지 드러내는

두 개의 다른 무대일 뿐이다.


내가 공부하고, 이해하고, 다시 설계하는 만큼

퇴직 후의 인생이 단단해진다.


직장인으로 보낸

30년의 다음 페이지를

넘기는 손끝은

조금 떨리고 있다.


퇴직은 끝이 아니라,

진짜 나로 살아갈 수 있는 프로젝트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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