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L216. 퇴직의 기술

가장 고독한 질문들

by Mira



1. 무엇으로 살아야 하는가


10년 동안 퇴직을 준비하면서

가장 자주 떠오른 질문이 있었다.

‘일’이 없는 나는 무엇으로 살아야 하나?


평소에는 조용히 숨어 있다가도

퇴근길이나 누군가의 퇴사 소식을 들을 때면

불쑥 고개를 드는 질문이었다.

마치 오래된 습관처럼,

나를 따라다니는 그림자 같았다.



2. 회사가 만들어 준 정체성


30년 동안 회사는

나의 일상, 나의 경제, 나의 정체성의 일부였다.

출근길의 리듬,

이메일의 온도,

상사의 말투, 회의의 패턴,

성과와 평가.


나는 그 구조 안에서

살아남는 법을 배웠다.

그러나 살아남는 법과

살아가는 법은

꼭 같은 기술이 아니다.




3. 이력서에 쓸 수 없는


일은 책임을 가르쳐주었고,

현실을 견디는 자세를 만들었고,

사람을 대하는 방식,

맞지 않는 사람과의 적절한 거리,

감정의 파도 속에서도

하루를 유지하는 근력을 남겼다.


이런 것들은

다음 이력서에 적을 일은 없지만

퇴직 이후에 더 필요한 힘이다.

대개 중요한 것들이

문서에서 빠져 있는 것은

세상의 오래된 전통이기도 하다.




4. 퇴직이 남기는 질문들


일이 사라진 뒤

나는 무엇으로 나를 설명할 것인가?


직업정신이 투철했다고 할 수도 없고,

대단한 성과를 거둔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스토너 교수처럼

평범한 업무를 견디는 데에는

내면의 치열함이 있었다.


우리는 오랫동안

직장에서의 ‘역할’로

자기 자신을 해석해 왔고,


그 역할이 사라진 자리에

커다란 침묵과 공백,

그리고 나라는 사람만

덩그러니 남는다.



5. 가장 고독한 질문들


데이비드 화이트는 말한다.

“우리가 가진 가장 고독한 질문들은

대개 일의 역할이 끝난 자리에서 우리를 기다린다.”


그 고독은

실패의 증거가 아니라,

새로운 파일을 열기 위한

작은 초기 설정 같은 것이다.

조용하고 서툰, 그러나 필요한 시간.




6. 퇴직 후, 삶의 기술


나는 아직

퇴직 후의 시간을 완전히 상상할 수는 없다.

상상보다 큰 공허가 찾아올까?

계획한 경제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해 줄까?


그래도 한 장면만큼은 선명하다.


책상 하나, 고양이 한 마리,

아침 햇빛, 오래된 책들,

기억 속에서 잊힌 언어들,

그리고 가려져 있던

내 감정의 온도.


그 사이에서

나는 회사가 만들어준 직책 없이

나라는 사람으로

하루를 설계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일을 통해 살아남았다.

퇴직 후에는 온전한 나로 살아야 한다.

생존의 기술을 넘어,

이제는 삶의 기술을 배우는 시간이다.



2025년 12월30일

20년간의 회사 생활을 공식적으로 마친 날입니다.

희망퇴직은 10년동안 준비해 온 프로젝트이자, 회사가 마지막으로 저에게 준 선물입니다.


지금까지 제 글을 함께 해주신 독자님들에게 감사합니다. 이제는 여러분의 아이디가 눈에 익어서, 안 보이면 궁금해 집니다…ㅎㅎ


2026년도에도 계속 글을 이어갈 지 저도 모릅니다. 한번 가 보조, 뭐.

함께 해주시면 큰 응원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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