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L217. 새로운 시대를 새기다

Etching the New Era —

by Mira

1. 요즘의 일상


내 하루는 아주 단순하다.

특별한 일정이라기보다는, 회복과 루틴 사이를 오가는 일종의 미세한 진동처럼 흘러간다.

외출이라고는 병원에 가는 것이 전부다. 주 3회.


좋아지는 것 같다가, 아닌 것 같다가,

변덕스럽지만 평화롭게

하루의 기운이 들쑥날쑥하다.



이 루틴이 나쁘진 않다.

누가 시키는 것도 아니고, 누구에게 보고할 필요도 없다.

요즘 내 삶에서 가장 좋은 점은 바로 그거다.


“하고 싶은 일만 하고, 평가받지 않는 하루.”


그게 이렇게까지 사람을 편안하게 한다는 걸

나는 최근에서야 정확히 알게 되었다.



2. 시험장


비 오는 새벽녘,

나는 어떤 시험장에 앉아 있었다.


현실에서는 아무도 나에게 시험을 보라고 하지 않지만

꿈은 늘, 기묘하게도, 그런 장면을 불러온다.


전혀 시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지만

초조하거나 불안하지는 않았다.

이 시험이 내 인생에 별 영향이 없다는 듯.

세상에서 가장 용감할 수 있는 사람은

바라는 게 없는 마음을 가진 자다.


시험지를 펼쳐보았지만

정답은 거의 떠오르지 않았다.


대신, 현대 대중문화나 디자인에 대한

나만의 흥미로운 관점만 계속 떠올랐다.


나는 그걸 적었다.

채점 기준에 전혀 맞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SO WHAT?


3. 감독관의 질문

시험이 끝나자 보라색 리넨 셔츠를 입은 감독관이 나에게 질문한다.

그의 표정은 약간의 실망과 약간의 힐난,

‘이쯤 되면 본인이 더 잘 아시죠?’라는 표정이 섞여 있었다.


“시험을 보고 나니 어떠십니까?”

나는 대답했다.


“제가 모르는 게 많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 말은 패배의 감정에서 나온 문장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요즘 내가 현실에서 느끼고 있는 감정—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의 편안함—과 훨씬 가까웠다.



꿈속 사람들은 늘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고 사라진다.

현실에서라면 그런 표정에 몹시 신경을 썼겠지만,

꿈에서는 이상하게 아무렇지 않았다.


‘그래, 그러셔라’ 정도의 느낌.



4. 새로운 시대를 새기는 방식


Etching.

금속판에 선을 새기는 작업.

세게 누르지도 않고, 대충 긁지도 않는다.

아주 정확한 압력으로, 오래 남을 선을 남긴다.


꿈에서 돌아온 뒤, 나는 조금 더 명확하게 알았다.


지금의 나는 정답을 맞히는 사람이 아니라,

내가 살아갈 다음 시대의 선을 천천히 새기는 중이라는 걸.



퇴직 준비, 병원 루틴, 글쓰기,

(이 글을 쓰는 2025년 12월 7일, 나는 이미 희망퇴직을 신청함 상태)

Self-looking의 시간.

느린 회복까지—


이 모든 것이 나를 다음 시대로 데려가고 있었다.

누군가 나를 평가하는 시대는 끝났다.



5. 누구에게도 평가받지 않는 하루

나의 새로운 시대는 이렇게 시작되는 것 같다.

거창한 선언도, 누군가의 승인이 필요한 절차도 없이.


그저 하고 싶은 일만 하고, 하기 싫은 일은 자연스럽게 미뤄두는 생활 속에서.


몸이 허락하면 글을 쓰고,

머리가 맑으면 책을 읽고,

피곤하면 스르륵 잠이 든다.


늦잠을 자도 좋고

새벽 4시의 고요함도 달콤하다.


수정하라고 지적하는 사람도 없고,

오늘의 성과를 보고하라는 결재 라인도 없다.


이제는 내가 내 삶의 시험을 낸다.

그리고 내가 평가한다.


채점 기준은 아주 단순하다.

“오늘 마음이 조금은 편안했는가.”

그렇다면, 오늘의 성과는 충분하다.


아주 조용하게,

그러나 선명하게

나는 새로운 시대를 새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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