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L221. 내 친구

자기 응시와 회복

by Mira

-퇴직 전, 휴직기간에 쓴 글입니다.


1. 외출


한의원 치료를 받고 있다.
주 3회 병원 가는 일이,

요즘의 유일한 외출.
건물 입구에 놓인 화분은 계절이 지나면서 잎이 조금 더 누렇게 변했다.

누군가 돌보기는 하는지 의심스럽다.

같은 건물 지하에서 넉 달째 공사를 하는데,

이렇게 시간이 오래 걸리다가 주인이 파산하는 거 아닌가 싶었다.


요즘 내 몸의 상태는 널을 뛴다.
어느 날은 가벼웠고
다른 날은 무거웠다.

날씨처럼 없이 매일 다르다.


의사에게는 신체적 증상만 말했다.

불면증은 수면제를 먹어도 별 효과가 없어

긴 밤을 보낸다.
식사를 하면 명치부터 막혀서, 뭘 먹기가 싫다.

잘 먹지 못하니 기운은 없는데

해야 할 일은 태산이다.
현기증이 너무 심해
매일 아침, 출근 시간마다 전쟁이었다.

휴직을 했으니, 아침에 실컷 늦잠을 자리라 했는데

웬걸, 혼자 미라클 모닝이다.


대기실 의자에는 항상 대기하는 환자들이 넘친다.
창가에는 아무도 읽지 않는 잡지들이 있다.



2. 휴직 연장


지난봄부터 나를 보고 있던 의사는
진료 기록을 천천히 넘겨 보더니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인다.


“휴직을 연장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의사는 적극적으로 내 얼굴에 가까이 다가왔다.
그녀의 금테 안경이 내 코에 닿을 거 같아서

나도 모르게 몸을 옆으로 기울였다.


그녀는 내 증상의 심각성을 설명했다.
단기간의 문제가 아니라
긴 시간 동안 누적된 거라고 했다.

20년 혹은 그 이상.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진료실 공기는 건조했고

평소에 있던 가습기도 보이지 않았다.


회사에서는 곧 희망퇴직 공고가 뜬다는 말이 돌았다.
후배들의 메신저가 얼마나 복닦거릴까.


3. 시끄러운 마음


퇴직을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은 사십 대 초반부터였다.
머릿속은 회사 일과 미래의 나를 상상하는 것으로 꽉 차 있었다.


출근길 지하도 벽면의 거울은
늘 잠깐 스쳐 지나갔다.
나는 그 앞에서 걸음을 멈추는 법이 없었다.

퇴근할 때면 몸이 녹초가 되어

누가 쫓아오는 사람처럼 집으로 향하는 걸음이 바빴다.


나는 회사 일이라도 붙잡고 있어야

나 자신의 끝없는 질문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었다.


2025년,
거울 속에서 처음 본 내 얼굴.
낯선 여자의 표정이

생각보다 담담했다.


50년 하고도 4년을 더 함께 한 얼굴.



4. ALONE


혼자 있는 시간.
고요한 방 안의 공기는 움직임이 없었다.

밖에서는 아이들이 목청껏 친구 이름을 부른다.


아이였던 나는
하얀 종이 위에 연필을 눕혀두는 것을 좋아했다.
무늬 없는 바닥에 엎드려 그림을 그리면
시간이 어떻게 지나가는지 몰랐다.


요즘 혼자 있는 시간은
의자 등받이 각도를 어떻게 조절해도
몸이 편해지지 않는 시간 같았다.
나는 아무것에도 집중하지 못했다.

영화도 책도 음악도.

휴대폰의 말초적인 영상도 어지러워 볼 수가 없다.


그나마 회사의 내 책상에서는 집중할 수가 있었다.

혼자 주말을 보낸고 나면

어서 출근해서 내 책상에 앉고 싶다고 생각했다.




5. 자기 응시


심리 상담실의 작은 탁자 위에는
종이컵에 담긴 미지근한 물이 있었다.
내가 하는 이야기는
내 귀에서 검열되고 있었다.


의사는 좀처럼 말이 없는 성격이었다.

내가 하는 말에 딱히 코멘트도 없다.

나는 범인을 잡아 달라고 의뢰하는 사람처럼

나를 짓누르는 것의 정체를 알고 싶었다.


‘죽더라도 회사에서 죽자’

몸이 아파서 결근과 반휴를 쓰는 날이 점점 늘었다.



6. 내 친구


어둡지도 밝지도 않은 정도의 오후 빛이
거실 바닥에 길게 드리워진다.


나는 요즘
나와 마주 앉는 연습을 한다.

그토록 도망 다니고 외면했던 나에게

슬그머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너무 오랜 시간을 방치했다.

어른의 친구는 자기 자신이어야 하는데.
언제쯤 자연스러워지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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