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의 대신 블랙 드레스
1.7년 만의 샤핑
10년 전, 퇴직 준비를 위해 나의 현금 흐름 파악부터 했다.
월급이야 고정이고, 지출을 항목별로 정리해서 쓰지 않아도 되는 돈을 잡아내기 위해.
1,000원도 아끼던 때라 매일 가계부를 쓰다 보니,
내가 좀 한심하기도 했다.
맨날 1만 원, 2만 원.
굳이 가계부를 쓰지 않아도 나가는 돈은 다 고만 고만한 수준.
어느 해는 일체의 소비를 줄이기 위해, 딱 1년만 옷을 사지 않기로 했다.
워낙 옷과 가방을 사랑하던 나로서는 거의 고문과도 같은 굳은 결심.
그때 매일 아침 출근룩, OOTD 사진을 찍었다.
옷장 속 고인 아이템으로도 잘 사는지 기록하고 싶었다.
그렇게 패션에 대한 샤핑 욕망을 억누르고, 머니트리에 집중하면 한 7년쯤 지난 후.
여름 사진을 보니, 이건 좀 아니다 싶었다.
오래된 티셔츠에 오래된 블루진과 오래된 샌들의 내 모습이 좀 초라해 보이더라.
더현대에서 아이쇼핑을 즐기다가 나도 모르게 그만,
필립 림의 블랙 드레스 앞에서 발길을 멈추어 한참 바라보았다.
집으로 돌아와 옷걸이에 그 드레스를 걸고 있더라.
무려 100만 원.
베이직 한 디자인이어서 관속에 들어갈 때까지 입을 수 있긴 한데,
당시 나의 금욕적 소비생활에서 빗장이 플리는 순간이었다.
지금 아껴야 나중에 웃는다 VS 지금 즐기지 않으면 언제?
이런 마음끼리 화끈하게 파이팅 했다.
2. 머니트리와 소비라는 이름의 욕망
그런 일탈도 있었지만, 깊은 후회와 반성 모드로 다시 원위치로 돌아오기도 했다.
그러다 또 지름신이 오시면 통장은 시원하게 비어졌다.
그런데 머니트리를 키운 지 7~8년 차 접어들면서
내가 소비하는 것보다
돈이 돈을 버는 속도가 약간 빨라지더라.
마이너스 통장을 쓰는 한이 있어도 정기투자는 계속했다.
늘 머릿속에는 이자율과 패션에 대한 욕망이 고군분투했다.
그런데 시간과 복리가 만들어낸 매직이 패션에 대한 열망을 채워주기 시작했다.
3. 내가 사랑하는 물건
나는 일시적인 유행템보다는 한번 사면 20년, 30년을
만족하면서 사용할 수 있는 아이템을 사랑한다.
캐시미어 니트라면 사족을 못 쓰고
기본 로퍼에 정신이 나간다.
패딩보다는 캐시미어 코트에 기꺼이 큰돈을 쓴다.
패딩은 패딩이고 코트는 코트.
전 국민이 다 입은 거 같은 몽클레어는 쳐다보지도 않는다.
뭐냐?
국민 교복도 아니고.
하지만
알파카나 캐시미어, 울 소재의 코트를 컬러별로 갖고 싶다.
블랙, 그레이, 네이비, 브라운, 버건디,
무려 25년 전,
가난하기가 그지없을 때 보자마자 '눈이 돌아서' 사 버린
돌체에 가바나의 브라운 홈스팡 코트는 이제 거의 빈티지 반열에 올랐다.
이런 소비 성향을 갖고 있으면서도 파산하지 않은 게 다행.
4. 탕진의 의미
탕진이라는 일탈은
잠깐 숨 좀 쉬자는 심리 아니었을까?
목표를 향해 가는 것도 중요한데, 잠시의 휴식이 필요할 때
우리에게는 약간의 허세가 담긴 탕진잼이 있다.
허세가 꼭 나쁜 건 아니다.
사람이 언제나 자기 자신과 딱 붙어 있을 수는 없다.
간지를 추구할 때,
허세스러운 마음으로 약간의 힐링을 받기도 한다.
5. 수의 대신 블랙 드레스
필립림의 블랙 드레스는
내 몸무게가 거의 40KG으로 가장 말랐을 때 사서,
약간 살이 붙으니까 입기가 곤란하게 되었다.
괜찮다.
옷을 꼭 입으려고만 사나.
어떤 것은 갖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좋은 아이템이 있다.
그리고 가끔
저 드레스를 입고 임종을 맞는 내 모습을 떠올리기도 한다.
수의 대신 필립 림의 블랙 드레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간지.
간지도 없는 인생을
무슨 맛으로 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