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재규어
1.사노요코를 생각한다.
사노 요코는 시한부를 통보받고 나서 재규어를 샀다.
그동안 너무 오래살면 어쩌나 싶어서
아껴둔 비상금의 빗장을 풀었다.
하지만 곧 건강이 악화되어 운전을 하지 못하고
차량 관리도 하지 못해
결국,
보네트 위에는 새똥이 가득했다고 회상하면서
킬킬 웃던 그녀의 문장.
그 책을 처음 읽었을 때는 40대였다.
이 멋지고 괴짜스러우면서도
무섭고 단호하게 독립적인 할머니의 매력에 빠졌다.
2.그로부터 10년 후,
퇴직을 하고 나니
그 재규어를 사던 그녀의 심정을 다시 헤아리게 된다.
나에게 퇴직은 30년 동안 고군분투했던,
그러나 내세울 것 없이 버티기만한 시절의 엔딩이다.
인생의 한 페이지가 넘어가는 기분 이렇게 씁쓰름한데,
삶의 엔딩을 마주한다면,
어떤 기분이 드는 걸까?
농담처럼 끝나버리는 생은 얼마나 많은 눈물과 인내를 요구하는 지.
어이없는 랜덤법칙이
삶의 디포트 값이라는 걸
알고 나니,
모든 게 덧없다.
덧없이 아름답고
덧없이 짠하다.
3.그녀의 재규어
사노 요코에게 재규어는
삶의 마지막 순간에 자신을 붙들어주는
조용한 위안이었을 것이다.
그 허망함까지 포함해서
그녀는 그것을 사랑했다.
그리고 나는
54세의 겨울에
‘어떻게 살 것인가’를
조금씩 다시 배우는 중이다.
이 나이에도 '새로운 것'이 있을 줄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거대한 목표나
거창한 계획이 아니다.
지금의 나를 정확히 지탱해주는 리듬,
감각을 잃지 않게 하는 일상의 리츄얼,
내 취향을 양보하지 않는 태도—
그 정도면 충분하다.
중요한 건 생이
“얼마나 남았는지”가 아니라
남아 있는 시간을
어떤 온도로 살아낼 것인지다.
언젠가, 나중에, 이따가
그 말들은 이제 내 삶에서 효력이 없다.
지금의 마음,
지금의 감각,
지금의 나.
4.허공을 향한 질주
덧이 없어서 더욱 애잔한 생을 무엇으로 붙들어 매고 버틸 수 있을까?
그녀에게 재규어는 위로가 되었을까?
아니면 허망한 기분만 더 들었을까?
분명한 사실은
새들이 그 차 위에서 기분 좋게 똥을 쌌다는 거다.
이제 나도
'언제가'
라든가
'나중에'라는 시간이 없다.
좋은 옷을 나중에 살 일도 없고
좋은 차를 '언제가' 살 일도 없다.
오늘 생각나면 오늘 하는 거다.
오늘 먹고 싶은 것
오늘 갖고 싶은 것
오지도 않을 '나중에'를 위해
아껴야 할 것은 없다.
조건 :
머니트리가 잘 자라고 있다면.
요코에게는 연금이 있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