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은 오류다, 아니다
1. 불안
불안은 늘
잘못된 선택의 신호처럼 취급된다.
그래서 불안해지면
사람들은 가장 먼저 묻는다.
“내가 틀린 선택을 한 건 아닐까.”
하지만 퇴직 이후의 불안은
조금 다른 성격을 가진다.
이건 실패의 결과라기보다,
외부의 구조가 사라진 뒤
자기 판단을 직접 운용해야 할 때
반드시 동반되는 감정에 가깝다.
2. 오류인지 아닌지는, 살아봐야 안다
오류인지 아닌지는
살아봐야 안다.
이후의 선택들이
희망퇴직을 오류로 만들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아직은
미지의 영역이다.
그래서 더 불안하다.
그리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이 불안은
내가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다.
아주 건강한 신호다.
3. 이미 게임은 끝났는데
“어떻게든 정년까지 버텨야 한다”와
“이 정도 준비되었으면 여기서 멈춰도 된다”는
두 명제는
아직도 내 안에서 싸우고 있다.
이미 게임은 종료되었는데,
오랜 신념만이
뒤늦게 따라오지 못한 상태다.
선택은 끝났지만
판단은
아직 현재형이다.
4. 내가 준비한 경제는 무엇을 가능하게 하는가
내가 준비한 경제는
자유를 약속하지 않는다.
다만 한 가지를 가능하게 한다.
선택을 서두르지 않을 권리.
이 정도의 준비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면허가 아니라,
무언가를 결정하기 전에
잠시 멈춰 설 수 있는 시간이다.
그래서 지금의 경제적 준비는
야망을 밀어 올리는 연료가 아니라,
공포가 판단을 왜곡하지 않도록 막는
브레이크에 가깝다.
5. 숫자는 용기가 아니라, 여유를 준다
경제적 준비가 해주는 가장 중요한 역할은
결단을 밀어붙이는 힘이 아니라,
결단을 늦출 수 있는 여유다.
• 오늘 불안하다고
바로 복귀를 결정하지 않아도 되고
• 이번 달 흔들렸다고
선택 전체를 오류로 판정하지 않아도 된다
숫자는
나에게 이렇게 말해준다.
아직 판단을 내려야 할 시점은 아니다.
이건 낭만적인 자유가 아니라,
아주 현실적인 유예다.
6. 실존의 불안과 경제적 위험은 다르다
실존적 불안과
경제적 위험은 같은 것이 아니다.
• 실존적 불안은
살아 있다는 증거이고
• 경제적 위험은
관리해야 할 변수다
이 둘을 구분하지 못하면
사람은 불안을 없애기 위해
다시 구조로 돌아가고,
그 선택을
“현실적인 결정”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때로 그건
현실이 아니라
불안을 빨리 끝내고 싶다는 욕망에 가깝다.
7. 그래서 나는 몇 가지 목표를 버렸다
나는 새로운 경제적 목표를 세우기보다
몇 가지 목표를 의식적으로 버렸다.
가장 먼저 내려놓은 건
계속 커져야 한다는 목표였다.
그 목표는
나를 부자로 만들기보다
늘 부족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다음으로 버린 것은
조기 은퇴라는 환상이다.
조기 은퇴는
자유의 다른 이름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현재를 끊임없이 인질로 잡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려놓은 건
정년을 대체할 또 다른 정년이다.
FIRE나 파이프라인 같은 말들 역시
다른 이름의 출근표처럼 느껴졌다.
8. 지금의 목표는 다르다
그래서 지금의 내 목표는
더 작고, 더 모호하다.
• 오래 버티는 것
• 판단을 서두르지 않는 것
• 불안이 생길 때
그 원인이
실존인지, 경제인지
구분할 수 있는 것
이 목표들은
수치로 측정되지 않는다.
대신
하루의 질로만 확인된다.
나는 이제
“얼마나 벌 것인가”보다
“얼마나 급하지 않게 살 수 있는가”를 묻는다.
이 질문은
나를 아주 부유하게 만들지는 않겠지만,
스스로에게 정직하게 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