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L294. 백수의 리듬

평온이 낯설다

by Mira


몇 주 동안, 내 선택이 옳았나. 잘했나.

이 질문이 나를 몰아세웠다.


결론은 단순했다.

살아봐야 한다.

퇴직을 ‘잘한 선택’으로 만드는 일은 지금부터 내 몫이다.


퇴직 자체로는 얻은 것도 분명하고, 잃은 것도 분명하다.

마음은 간사해서 얻은 것은 금세 흐릿해지고, 잃은 것의 상실감에 오래 머문다.

쏟아지는 질문에 일일이 답하려 하지 않는다. 대신 일상의 리듬을 찾으려 움직인다.


퇴직 후 유난히 화분을 많이 샀다.

전에도 식물을 좋아했지만, 내 몸 하나 간수하기 힘들어 많이 죽였다.

다시 화분을 들이며 생각한다.

식물의 생명력,

그 조용한 에너지를 닮고 싶다고.


각각의 색과 형태에서 나는 마티스를 떠올리고, 자코메티의 조형을 본다.

수형에 따라 달라지는 선을 바라보며 종의 이름을 찾아보고, 성질과 선호하는 환경을 알아본다.

공부라기엔 거창하고, 그냥 혼자 노는 시간이다.


식물의 이름은 은근히 문학적이다.

유래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새벽이다.

순순하게 무언가에 집중하다가 맞는 새벽의 맛이 좋다.

아무 일정도, 의무도 없는 시간. 그 시간의 밀도가 조금씩 높아지고 있다.


출근을 위해 억지로 몸을 깨우지 않아도 된다.

퇴근 후의 방전 상태 없이, 좋아하는 일에 몰두하다가 스르르 잠이 든다.


인생에서 처음 누리는 호사다.

이 시간을 나에게 선물하기 위해 버텨온 시간들을 떠올린다.


그런데 문득 묻는다.

이건 너무 과분한 선물은 아닐까.


나는 아직 이 평온이 어색하다.

얼마나 유지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가끔 불안을 만든다.


그럼에도

나는 조금씩 리듬을 탄다.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불안의 파도는 높았다.


그리고 또,

예상했던 것보다

그 파도는 천천히 가라앉고 있다.


압도되었다면

다시 술을 찾았을지도 모른다.

약으로 잠들어 버리려 했을지도.


그걸 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도

나에 대한 신뢰를 조금 단단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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