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EY] M295. 퇴직금을 대하는 자세

예측 대신 대응을 설계한다

by Mira



2018년


계열사 이동으로

퇴직금을 수령하거나 이연할 선택지가 생겼다.


예상하지 못한 상황.

나는 며칠을 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엑셀을 켰다.

잘 다루지도 못하면서.


숫자를 넣고

지우고

다시 넣었다.


그때의 나는

투자, 인플레이션, 원화 가치 같은 단어를

막 어렴풋이 깨우치던 단계였다.


1억의 가치는 10년 뒤에도 1억일까?


지금 퇴직금을 이연하면

10년 뒤 나는 얼마를 받게 될까?


나는 이 회사에서 정년까지 다닐 수 있을까?


임금피크제로 연봉이 깎이면

퇴직금은 어떻게 변할까?



2025년


나는 희망퇴직을 선택했다.


퇴직금과 위로금을 합치니

내가 한 번도 다뤄보지 못한 규모의 돈이 되었다.


일시수령?

IRP로 이연해 연금화?


퇴직 전부터 거의 1년을

계산하고 또 계산했다.


엑셀 파일은 몇 개나 만들었는지 모른다.

숫자를 바꾸면 결과도 바뀌었다.

당연한 일인데도, 매번 마음이 출렁였다.



퇴직일로부터 2주쯤 지나

퇴직금이 입금되었다.


기쁨이라기보다는

묵직함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통장에 찍힌 숫자는 컸지만

그 숫자만큼의 확신은 없었다.



월급이 있을 때는

조금 공격적으로 투자해도 괜찮았다.


생활은 계속 굴러갔다.

월급이라는 자동 보충 장치가 있었으니까.


퇴직 후에는

목돈을 손에 쥐고도

찔끔찔끔 들어오던 월급이 그리워졌다.



통장에 찍힌 숫자에서

0 하나가 사라진 기분이었다.


돈이 줄어든 건 아니었다.

오히려 늘어났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안전하다는 느낌은 줄어들었다.


매달 자동으로 들어오던 월급이

하나의 0이었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그 0은 숫자라기보다

리듬이었고,

확신이었고,

미래에 대한 암묵적인 약속이었다.


목돈은 묵직했지만

월급은 가벼운 숨처럼 규칙적이었다.


퇴직 후의 나는

그 숨을 멈춘 채

큰돈을 들고 서 있는 사람 같았다.


움직이면 줄어들 것 같고,

가만히 두면 썩을 것 같았다.


그래서 처음에는

수익률보다 손실을 피하는 데 집착했다.


조금 오르면 불안했고,

조금 떨어져도 불안했다.



시장 예측은 나의 영역이 아니었다.


금리는 내가 정할 수 없고,

시장은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환율도, 정책도, 경기 사이클도.


나는

통제할 수 없는 것들을 붙잡고

안전해지려는 마음을 단정하게 정리하려고 한다.


그 대신

통제할 수 있는 것을 정하기로 했다.


얼마를 한 번에 넣지 않을 것.

몇 개월에 나누어 들어갈 것.

어떤 비율을 기본으로 둘 것.

하락이 오면 어떻게 반응할 것.


예측 대신 대응.

감정 대신 구조.


매월 1일,

같은 날에,

같은 비율로.


시장이 -15%를 넘기면

그때는 조금 더 기회를 본다.


그저

시장에서 오래 버티는 구조를 만든다.


통장에 찍힌 숫자에서

0 하나가 사라진 기분이 들던 날로부터,


나는

숫자에 매달리는 사람에서

숫자를 다루는 사람으로

조금은 이동한 것 같다.




퇴직금을 대하는 자세


통장에 찍힌 숫자에서

0 하나가 사라진 기분이 들던 날,

나는 돈의 크기보다

내 마음의 크기를 먼저 보았다.


퇴직금은 보상이 아니라

질문이었다.


이 돈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어떻게 버틸 것인가.

얼마나 오래 견딜 수 있는가.


처음에는

이 돈을 잃지 않는 방법을 찾으려 했다.

그다음에는

이 돈을 불리는 방법을 찾으려 했다.


지금은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


퇴직금을 대하는 자세는

수익률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라는 것.


예측하지 않고,

과장하지 않고,

공포에 쫓기지 않고,


정해 둔 날에,

정해 둔 비율로,

정해 둔 범위 안에서만 움직이는 것.


퇴직금은

나를 부자로 만들어 줄 마법의 씨앗이 아니라,

앞으로의 시간을 지탱해 줄 연료다.


연료는 한 번에 태우지 않는다.

천천히, 오래,

그리고 계획적으로 사용한다.


나는 이제

퇴직금을 붙잡고 있지 않다.

그 위에 구조를 얹어두었을 뿐이다.


예측은 여전히 불가능하다.

하지만 대응은 설계할 수 있다.


그 차이를 알게 된 것이,

내가 퇴직금으로 얻은

가장 큰 수익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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