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L296. 오후의 산책

아무것도 급하지 않다

by Mira



오후 4시.


회사에 있었다면

퇴근 시간을 계산했을 시간.


백수의 오후 4시는

산책 시간이다.


당근으로 제라늄 화분을 예약하고

일부러 먼 길로 돌아간다.

겨울 냄새가 아직 남아 있지만

공기 어딘가에는

벌써 푸릇한 봄이 섞여 있다.


예전에는 이 시간이

하루를 버티는 끝자락이었다.

시계를 힐끗 보며

남은 업무를 가늠하고

퇴근 버튼을 누를 순간을 기다렸다.


지금은

누가 끝내주지 않아도

하루가 저절로 기울어 간다.

해가 조금 더 길어졌고,

나는 조금 덜 급해졌다.


스치듯이 지나가는 생각들.


이대로 괜찮은가.

언제까지 쉬면 될까.


1년은 아무것도 하지 않기.

여행하듯

일상을 살아보기.


그토록 간절히 바라던 시간인데

왜 나는 자꾸

다른 길을 떠올릴까.


속도를 멈추고

천천히 살기로 했는데

몸 어딘가에는 아직 관성이 남아 있다.

아무도 재촉하지 않는데

나는 여전히

뭔가 생산적인 일,

돈이 되는 일을 해야 하지 않나

골똘해진다.


노트를 펼치면

아이디어는 흐릿하고,

해야 할 일 대신

정리되지 않은 생각만 쌓인다.


그럴 때면

조금 더 천천히 걷는다.


산책은 성과가 없고

보고할 것도 없지만

리듬을 되찾게 해 준다.


회사에 다닐 때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하루를 꿈꿨다.

출근하지 않는 아침,

마감이 없는 오후,

시계에 쫓기지 않는 시간.


지금 나는

그 시간을 살고 있다.


그런데

바람처럼 불안이 불어온다.

멈춰 있으면 뒤처질 것 같고,

아무것도 만들어내지 않으면

존재가 흐릿해질 것 같은 기분.



여행 같은 일상


여행지에서는

누구도 성과를 요구하지 않는다.

그저 걷고,

보고,

머물고,

해 질 무렵 숙소로 돌아오면 그만이다.


이 1년도

어쩌면 그런 시간일지 모른다.


다음 도시를 서두르지 않고

지금 머무는 곳을

조금 더 천천히 둘러보는 시간.


퇴근을 기다리던 사람에서

산책을 기다리는 사람으로.


달라진 것은 직함이 아니라

기다리는 방향인지도 모른다.


오늘도 오후 4시가 되면

나는 밖으로 나간다.

제라늄 화분 하나 사서 돌아오는 길,

해는 조금 더 길어지고

나는 조금 차분해진다.


아직

완전히 편하지는 않지만

이 리듬을

익히는 중.

작가의 이전글[MONEY] M295. 퇴직금을 대하는 자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