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은 작다
아기 달개비
늘어진 달개비꽃 사진을 보고 홀딱 반했다.
무성하게 키운 것이 아니라
선을 살려 우아하게 흐르게 한 모습.
과하지 않았고,
억지로 풍성하지도 않았다.
나는 아기 달개비를 네 포트 주문했다.
혹시 모를 실패에 대비해서.
도착한 아이들은
사진 속 모습과 전혀 달랐다.
포트 속에서 몸을 웅크린 채
작은 잎을 숨기고 있었다.
이게 그 달개비라고?
해가 잘 드는 창가에 두었다.
물을 너무 많이 줘도 안 되고,
직사광이 너무 강해도 안 된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가끔
바람이 통하게 해주는 일.
그 정도.
선을 살려 키운다는 건
무언가를 더하는 일이 아니라
덜 개입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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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의 기본 패키지
요즘 나의 하루도 비슷하다.
수영하고 나오면
전신이 은은하게 떨린다.
집에 와서 간단히
샌드위치나 파스타를 만든다.
햇살을 받으며 낮잠을 잔다.
두 시간 넘게 깊이 잠들었다가
깨고 나면
세상이 조금 느리다.
급한 메일도,
회의도,
보고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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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세한 진동
퇴직 직후에는
뭔가를 많이 샀다.
화분을 늘리고,
소품을 들이고,
공간을 채웠다.
지금 생각해 보면
허전함을 메우려는 동작이었다.
회사라는 시스템이 사라지면
나는 나를 운영할 수 있을까.
그 질문이 무거웠다.
퇴직 두 달이 넘어가는 시점.
나는 수영장에 가고,
매일 공간을 정리하고,
원고를 쓴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나는 나를 방치하지 않는다.
몸에는 아직
미세한 진동이 남아 있다.
조금 불안하고,
조금 자유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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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식시장과 거리 두기
의식적으로
시장과 거리를 둔다.
매일 그래프를 들여다보면
바닥 같고,
오르면 놓친 것 같고.
나는 순발력 있는 투자자가 아니다.
그래서 정해진 날에
정해진 만큼 매수하고
잊고 지낸다.
수영하고,
잘 먹고,
잘 자고,
한 줄이라도 쓰는 날.
이런 날이 반복되면
사람은 조금 단단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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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의 밀도
공간의 밀도는 낮추고,
내면의 밀도는 높이는 중이다.
화장대에는
매일 쓰는 것만 남겼다.
서랍이 비어 있는 걸 보면
기분이 좋다.
전시보다 기능.
과시보다 감각.
타인이 나를 어떻게 볼까 보다
나는 나를 어떻게 느끼는가.
이 질문 앞에서
무의미한 소비는 걸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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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살리는 삶
나에게 온 지 한 달 남짓 된
달개비는 아직 작다.
우아하게 늘어지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요즘의 나도 그렇다.
억지로 풍성해지려 하지 않고,
무언가를 더 채우려 하지 않는다.
수영을 하고,
밥을 먹고,
잠을 자고,
글을 쓰는 날.
슬로우 모션으로
인생의 한 챕터가 넘어가는 걸
지켜본다.
안도의 마음과
아쉬운 마음이
섞여 있다.
한 챕터를 완성한 작가가
다음 문장을 망설이듯,
나는 잠시 멈춰 있다.
그런데
이 멈춤이 불안하지 않다.
선을 살려 자라는 식물처럼
과하지 않게,
넘치지 않게.
오늘도
이 정도면 충분하다.
달개비도,
나도
지금은
아직 자라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