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L302. 선을 살리는 시간

아직은 작다

by Mira




아기 달개비


늘어진 달개비꽃 사진을 보고 홀딱 반했다.


무성하게 키운 것이 아니라

선을 살려 우아하게 흐르게 한 모습.

과하지 않았고,

억지로 풍성하지도 않았다.


나는 아기 달개비를 네 포트 주문했다.

혹시 모를 실패에 대비해서.


도착한 아이들은

사진 속 모습과 전혀 달랐다.

포트 속에서 몸을 웅크린 채

작은 잎을 숨기고 있었다.


이게 그 달개비라고?


해가 잘 드는 창가에 두었다.

물을 너무 많이 줘도 안 되고,

직사광이 너무 강해도 안 된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가끔

바람이 통하게 해주는 일.

그 정도.


선을 살려 키운다는 건

무언가를 더하는 일이 아니라

덜 개입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하루의 기본 패키지


요즘 나의 하루도 비슷하다.


수영하고 나오면

전신이 은은하게 떨린다.

집에 와서 간단히

샌드위치나 파스타를 만든다.

햇살을 받으며 낮잠을 잔다.


두 시간 넘게 깊이 잠들었다가

깨고 나면

세상이 조금 느리다.


급한 메일도,

회의도,

보고도 없다.



미세한 진동


퇴직 직후에는

뭔가를 많이 샀다.


화분을 늘리고,

소품을 들이고,

공간을 채웠다.


지금 생각해 보면

허전함을 메우려는 동작이었다.


회사라는 시스템이 사라지면

나는 나를 운영할 수 있을까.

그 질문이 무거웠다.


퇴직 두 달이 넘어가는 시점.

나는 수영장에 가고,

매일 공간을 정리하고,

원고를 쓴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나는 나를 방치하지 않는다.


몸에는 아직

미세한 진동이 남아 있다.

조금 불안하고,

조금 자유롭다.



주식시장과 거리 두기


의식적으로

시장과 거리를 둔다.


매일 그래프를 들여다보면

바닥 같고,

오르면 놓친 것 같고.


나는 순발력 있는 투자자가 아니다.

그래서 정해진 날에

정해진 만큼 매수하고

잊고 지낸다.


수영하고,

잘 먹고,

잘 자고,

한 줄이라도 쓰는 날.


이런 날이 반복되면

사람은 조금 단단해진다.



공간의 밀도


공간의 밀도는 낮추고,

내면의 밀도는 높이는 중이다.


화장대에는

매일 쓰는 것만 남겼다.

서랍이 비어 있는 걸 보면

기분이 좋다.


전시보다 기능.

과시보다 감각.


타인이 나를 어떻게 볼까 보다

나는 나를 어떻게 느끼는가.


이 질문 앞에서

무의미한 소비는 걸러진다.



선을 살리는 삶


나에게 온 지 한 달 남짓 된

달개비는 아직 작다.

우아하게 늘어지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요즘의 나도 그렇다.


억지로 풍성해지려 하지 않고,

무언가를 더 채우려 하지 않는다.


수영을 하고,

밥을 먹고,

잠을 자고,

글을 쓰는 날.


슬로우 모션으로

인생의 한 챕터가 넘어가는 걸

지켜본다.


안도의 마음과

아쉬운 마음이

섞여 있다.


한 챕터를 완성한 작가가

다음 문장을 망설이듯,

나는 잠시 멈춰 있다.


그런데

이 멈춤이 불안하지 않다.


선을 살려 자라는 식물처럼

과하지 않게,

넘치지 않게.


오늘도

이 정도면 충분하다.


달개비도,

나도

지금은

아직 자라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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