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L301. 퇴직자의 3월

루틴이 자란다

by Mira



3월의 꽃


입학 시즌이다.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신입생들의 설렘과 그들을 응원하는 꽃다발이 거리에서 춤춘다.


퇴직자의 3월에는 아무 세리머니가 없다.

괜찮다.

어른이니까.





루틴 부자


나의 3월도 시작됐다.

퇴직 3개월 차.

이번 달에는 수영에 이어 루틴이 하나 더 생겼다.


매주 두 번,

아파트 단지에서 만난 강아지 밤이의 산책을 맡게 되었다. 재택근무를 하는 주인이 출근하는 이틀, 나와 오후 한 시간을 함께 걷는다.


밤이는 유기견 보호센터 출신이다.

5년째 사랑받으며 살고 있지만, 흥분하면 가끔 무는 버릇이 있다. 나는 다정하게 애정을 퍼붓는 산책러가 아니다. 단호하고, 일정한 톤으로, 흥분시키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주인을 기다리는 밤이 에게는 지루함을 달래주는 시간이고, 나에게는 산책이라는 루틴을 좀 더 단단하게 만들어 주는 시간이다.



퇴직하면 이렇게 지내고 싶다고 적어 두었던 목록을 하나씩 실천 중이다. 오랫동안 생각만 하던 수영을 시작했고, 동네 강아지 산책도 맡았다. 매일 원고를 쓰고, 매달 정해진 날에 투자를 한다.

루틴은 아직 여리지만, 반복되면서 형태를 갖추는 중이다.


지난 두 달 동안은

꽤 긴장했던 것 같다.

나를 운영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하듯

엄격하게 루틴을 붙잡고 있었다.

그러다 지난 주말, 이틀 동안 완전히 퍼졌다.

침대에서 나오지 않고 파자마를 갈아집지도 않은 채, 영화를 이어서 봤다.

평일 낮, 끝없이 이어지는 영화 장면 속에 잠겨 있는 시간도 좋았다.

드디어, 퇴직자의 자유를 죄책감 없이 누리게 된 건가.




불안의 원인


가끔 깊은 곳에서 불안이 올라온다.


만약 휴직 상태였다면 어땠을까?

아주 구체적으로 상상해 보았다.

아마 놓쳐버린 희망퇴직의 조건이 더 매력적으로 느껴졌을 거다.


그 돈으로 할 수 있었을 선택지들을 떠올리며 또 다른 상실감을 만들었을 것이다. 결국 어떤 선택을 했어도, 불안은 다른 얼굴로 찾아온다.


존재론적인 불안은 직업의 유무와 무관하다.

경제적 준비와 생활의 변화, 정체성의 문제는 각각 다른 층위에 놓여 있다.



링 위의 복서


머리로는 수없이 시뮬레이션했지만, 실전은 다르다. 복서가 아무리 연습을 해도 링 위에 오르기 전에는 긴장할 수밖에 없다. 펀치를 상상하는 것과 직접 맞는 것은 다르다. 생각보다 더 아프고, 더 선명하다.


그래도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다.

불안의 펀치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제법 유연하게 반응하는 법을 배우는 중이다.


퇴직자의 3월에 응원의 꽃다발은 없다.

대신 루틴이라는 뿌리가 조용히 자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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