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L311. 나와 아기 코끼리

코끼리가 작아졌다

by Mira




퇴직.

30년의 회사 생활에서 벗어났다는 해방감은

생각보다 오래가지 않았다.


겨우 2주 정도.


아침에 눈을 뜨면

무거운 하루가 버티고 있다.

커다란 코끼리를

올려다보는 기분.


뭘 해야 할지 모르는

어색한 자유.



퇴직 3개월 차,

요즘 나의 하루는

2~3시간 단위로 돌아간다.


마치 알고리즘이 고른 음악처럼

비슷한 장르의 하루가

조용히 이어진다.




Chapter 1


아침.


커피 한잔을 들고

베란다로 간다.


어깨에 아침 햇살을 얹고

천천히 잠에서 깬다.


집을 정리하고

식물을 살핀다.


간단히 아침을 먹고

수영장에 갈 준비를 한다.




Chapter 2


수영.


물속에서 몸이 느슨해진다.

머릿속도 고요해진다.


운동을 한다는 생각보다

물장구치며 놀아볼까?

이런 마음으로 실컷 놀다 보면

30분이 금방 지나간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봄을 느낀다.




Chapter 3

오후 2시부터는 뭘 하든 내 마음대로.


잠깐 낮잠을 자기고 하고

영문책을 필사하기도 한다.

요즘의 필사책은

켄트 하루프의 소설

<OUR SOUL AI NIGHT>




Chapter 4


늦은 오후의 산책.

몸을 다시 바깥으로 데리고 나간다.

한 시간 동안 걷는다.


회사 다닐 때

가장 좋았던 시간대는

점심식사 후 15분의 산책.

하지만 사무실로 돌아가야 하는 시간에서

1분이라도 늦게 사원증이 찍히면

눈치 보여서 늘 아쉬웠다.




Chapter 5


집으로 돌아와

필사를 마저 하거나.

포트폴리오를 점검하기도 한다.

원고를 쓰기도 하고.


해가 지면 향초를 켠다.



우즈윅의 린넨 향이

타는 소리, 탁탁탁

나의 키보드 소리, 탁탁

음악은 빌 에반스나 쳇 베이커

또는 재즈 피아노.

강아지 조이가 코 고는 소리도 가끔.



밤이 조용히 지나간다.


아, 오늘도 좋았다.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 없다.

시간에 쫓길 일도 없다.

억지로 하는 일도 없다.


그냥 나로 있으면 된다.


어느새

하루가 아기 코끼리만큼 작아졌다.

작가의 이전글[LIFE] L310. 해피엔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