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가 작아졌다
퇴직.
30년의 회사 생활에서 벗어났다는 해방감은
생각보다 오래가지 않았다.
겨우 2주 정도.
아침에 눈을 뜨면
무거운 하루가 버티고 있다.
커다란 코끼리를
올려다보는 기분.
뭘 해야 할지 모르는
어색한 자유.
퇴직 3개월 차,
요즘 나의 하루는
2~3시간 단위로 돌아간다.
마치 알고리즘이 고른 음악처럼
비슷한 장르의 하루가
조용히 이어진다.
Chapter 1
아침.
커피 한잔을 들고
베란다로 간다.
어깨에 아침 햇살을 얹고
천천히 잠에서 깬다.
집을 정리하고
식물을 살핀다.
간단히 아침을 먹고
수영장에 갈 준비를 한다.
Chapter 2
수영.
물속에서 몸이 느슨해진다.
머릿속도 고요해진다.
운동을 한다는 생각보다
물장구치며 놀아볼까?
이런 마음으로 실컷 놀다 보면
30분이 금방 지나간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봄을 느낀다.
Chapter 3
오후 2시부터는 뭘 하든 내 마음대로.
잠깐 낮잠을 자기고 하고
영문책을 필사하기도 한다.
요즘의 필사책은
켄트 하루프의 소설
<OUR SOUL AI NIGHT>
Chapter 4
늦은 오후의 산책.
몸을 다시 바깥으로 데리고 나간다.
한 시간 동안 걷는다.
회사 다닐 때
가장 좋았던 시간대는
점심식사 후 15분의 산책.
하지만 사무실로 돌아가야 하는 시간에서
1분이라도 늦게 사원증이 찍히면
눈치 보여서 늘 아쉬웠다.
Chapter 5
집으로 돌아와
필사를 마저 하거나.
포트폴리오를 점검하기도 한다.
원고를 쓰기도 하고.
해가 지면 향초를 켠다.
우즈윅의 린넨 향이
타는 소리, 탁탁탁
나의 키보드 소리, 탁탁
음악은 빌 에반스나 쳇 베이커
또는 재즈 피아노.
강아지 조이가 코 고는 소리도 가끔.
밤이 조용히 지나간다.
아, 오늘도 좋았다.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 없다.
시간에 쫓길 일도 없다.
억지로 하는 일도 없다.
그냥 나로 있으면 된다.
어느새
하루가 아기 코끼리만큼 작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