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정원은 결과, 과정은 노동
퇴직을 하고 나니 인간관계가 한 줌만 남았다.
그렇다고 회사 후배들에게 먼저 연락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괜히 부담이 될까 봐.
사운즈 한남에서 지인을 만났다.
일로 알게 된 사이지만
오래 보고 싶은 분.
“이제 뭐라고 불러야 하죠?”
그녀의 웃음기 어린 질문
“그냥 언니라고 해줘요.
더 이상 책임지기 싫어요.”
10년 넘게 책임디자이너 불렸다.
이제는 더 이상 의미 없는 호칭.
미국 대학 입시를 준비하는 자녀 이야기로 대화가 시작됐다.
한국 입시와는 스케일이 다른 전략이 필요하다고 했다.
듣다 보니 인생과 비슷했다.
선택을 하면 동시에 다른 기회를 포기해야 한다.
희망퇴직을 선택하면서
내가 포기했던 것들과
어딘가 닮아 있었다.
표면적으로는 대학 입시지만
내용적으로는 축소된 인생의 실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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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으로 돈카츠와 우동을 먹었다.
낮은 조명 아래 재즈 피아노가 들릴 듯 말 듯 흐르고 있었다.
마치 긴자의 작은 식당에 들어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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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 후에는 마르지엘라와 르메르 매장을 둘러봤다.
요즘은 수영만 다니다 보니
거의 운동복 차림으로 살고 있었다.
오랜만에 패션 DNA가 건드려져
눈이 반짝였다.
하지만 옷보다 더 눈길을 끈 것은
공간 연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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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메르 매장은 한남동의 주택을 개조한 공간이었다.
작은 연못이 있는 정원이 있었다.
나무와 돌, 식수가 절제된 방식으로 놓여 있었다.
과하지 않은데도
묘하게 시선을 붙잡았다.
나는 한동안 그 앞에 서 있었다.
여기 앉아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식수 하나하나를 천천히 눈에 담고 싶었다.
이런 마당이 있으면
고양이와 강아지들이 얼마나 잘 놀까.
그러다 곧 다른 생각이 따라왔다.
이런 정원이 있으면
아마 온종일 노동이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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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을 바라보다가
문득 내 베란다가 떠올랐다.
히아신스 화분.
아직 싹도 틔우지 않았다.
괜히 흙만 뒤집어 놓은 것 같았다.
헛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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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정원은 결과다.
과정은 노동이다.
인생도 비슷하다.
남의 눈에 좋아 보이는 것은 몇 장면뿐이고
그 장면 뒤에는 각자의 이야기가 있다.
디자인도, 대학 입시도
수많은 가능성 속에서 나만의 것을 찾는 과정이다.
원하는 것이 분명해도
돌아서서 놓쳐버린 것들을 떠올리면
머릿속이 어지럽다.
그래도 어쩌겠나.
그게 인생이 내주는 숙제인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