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심 Oct 14. 2022

이타심, 이타적인 삶.

'말'이 아닌 '삶의 모습'으로 가르침을 주시는 분들.

십 수년, 혹은 수십 년 가까이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을 돕는데 인생을 다하고 계신 60대의 한 목사님 부부와 인연이 닿았다. 어떻게 그렇게 의미 있는 일을 하시는지 여쭈었더니 돌아온 대답이 너무나 명쾌했다. 

"그냥, 좋아서 해요. 제가 좋아서."


5살의 어린아이들부터 중고생까지. 해도 해도 끝이 없는 아이들 돌보는 일.

급여가 많은 것도 아니고, 누군가 딱히 알아주는 일도 아니다.

아이들이 나중에 크면 감사함을 깨닫기도 하겠지만, 사춘기의 아이들은 반항심에 되려 두 분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일도 허다하다. 그런데도 단지 '좋아서' 하신다니 의아했다.


목사님 내외 두 분. 

짐작건대, 처음에는 사명감과 책임감으로 손길이 필요한 아이들을 보살피기 시작하셨으리라. 시간이 흐르면서 그 이타심은 그분들의 '삶' 자체가 되었다. 이타적인 삶. 


하루는 사춘기의 한 아이가 학교에 가지 않았다. 학교 담임선생님은 당연하다는 듯이 집이 아닌 센터로 전화를 주셨고, 두 분은 그 아이를 하루 종일 찾아다니셨다. 이 지역이 아무리 좁다고는 해도 어디로 숨었을지 모르는 사춘기 아이를 찾는 건 쉽지 않은데, 두 분은 그렇게 온 세종을 뒤져서 결국 그 아이를 시내의 한 PC방에서 찾아냈고, 집으로 안전하게 돌려보내셨다. 그리곤 기진맥진하여 센터로 돌아오셨다.


"그 아이, 부모가 없는 것도 아닌데, 두 분이 이렇게까지 하셔야 하나요?" 

60대의 적지 않은 연세에, 얄궂은 날씨에, 종일 밖에서 아이를 찾느라 전전긍긍하셨을 모습이 안타까워 푸념하듯 말씀드렸다.

"저희라도 아이를 찾아서 다행이에요."

부모도 이미 놓아버린 그 아이의 손을 끝까지 잡고 계신 두 분.


여기엔 어른에게 상처를 받은 아이들이 많다고, 그래서 그 아이들이 더 이상 상처받게 하고 싶지 않다는 말씀을 하시며 눈물을 글썽이던 모습에서 아이들에 대한 사랑과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 

학교에 무단결석 했던 그 아이를 찾아 하루종일 헤매신 것도, 그 아이에게 "우리는 너를 놓지 않았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부모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받은 아이들, 여러 불우한 상황에 놓여있는 아이들. 그런 아이들의 부모가 되어주고 계신 두 분의 모습은 나에게 많은 가르침을 준다.

내 삶이 이타심이 아닌 이기심으로 채워져 있는 건 아닌지, 나를 필요로 하는 누군가의 도움을 '몰랐다'는 핑계로 외면하고 있는 건 아니었는지, 내 삶을 되돌아보고 반성하게 된다.


뉴스에서 한 번씩 보도되는 '폐지 수집으로 모은 돈을 모두 기부하는 할머니', '주인 잃은 떠돌이 개를 수십 마리씩 보살피는 사람들', '보육원이나 독거노인을 방문하여 봉사활동을 하는 사람들'.

이 분들 모두 어떠한 대가를 바라는 게 아니다. 그저 마음이 좋아서 하시는 일이다. 그 마음이 이타심인 거고.


이타심을 가진 분들이 많아질수록 우리 사회는 더욱 아름다워질 수 있을 것이다. 

처음부터 누군가에게 거창한 도움을 주려고 계획하기보다는, 내 주위에 관심을 갖고 바로 실천할 수 있는 작은 일들부터 행하다 보면, 나도 언젠가는 그분들처럼 '이타적인 삶'에 조금은 가까워지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작가의 이전글 목적 없는 독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