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
무지는 죄가 될 수 있는가? <우신예찬> 독후감
노름에 미쳐 신주도 팔아먹는 것, 서로의 고충을 헤아리지 못하고 시기질투하여 배척하는 것, 자기 자신을 너무나 사랑하여 남의 처지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것 등, 진세를 거쳐 가는 모든 천요만악의 근원은 무지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해 왔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뒷받침하듯 무지에 대한 비평의 목소리는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는데, 심지어는 종교에서도 찾을 수 있었다. 또한 그중에는 천주교도 포함되는데, 인도주의에서 뿌리내려 박애를 강조해 오던 것을 생각하면 실로 놀라운 광경이 아닐 수가 없다.
바울은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10:2,3)”
*여기서 ‘열심’은 율법을 지키려는 열심을 말한다. 그리고 ‘그들’은 이스라엘을 말한다.
라고 말하며 무지가 야기한 이스라엘의 비참한 말로에 대해 이렇게 규명한다. “‘그들’은 율법을 지킴으로서 의로워진다고 생각하였기에 온 힘을 다해 율법을 따르고자 하였다. 이로 인해 ‘그들’은 율법을 통해 의로워질 수 있다는 덫에 걸리게 되었고,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교만에 빠지게 되었다. ‘그들’의 열심은 오히려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이는 깨달음 없는 열심은 그들의 신을 따르기보단 파멸과 파괴를 가져온다는 것을 의미하며, 무지를 경계하고 경각심을 가질 것을 일깨운다.
역시 천주교도 무지까지 사랑으로 포용하긴 무리였던 걸까. 농담이고, 도대체 무지가 인간에게 무슨 해악을 끼치길래, 개인, 사회, 대중, 종교를 막론하고 잠자코 달관하고 있던 이들도 한 마디씩 거드는 걸까? 어째서 그들은 무지를 꺼리고 불경스러워하며, 무지에게 악이라는 선고를 내린 걸까? 과연 무지는 죄인 것일까?
죄를 판별하기에 앞서, 우선 책 속 우신(怣神)이라는 어리석은 존재가 주장하는 무지, 즉 어리석음에 대해 들어봐야 한다. 어리석은 존재가 설명하는 어리석음이라, 역설적이고 모순적인 상황에 어처구니가 없을 수도 있다. 어리석음에서 멀어지기 위한 답을 찾긴커녕 오히려 우신의 농변이 어리석음에 영영 구속될 상황에 봉착하게 만든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어리석음의 본질을 관통하고 그것을 친히 설명까지 해줄 존재를 어디서 찾으랴. 그러니 우린 속는 셈 치고 기존의 인식 체계에 따른 보수적인 마음으로 이를 재단하는 데서 벗어나, 어리석음이 주는 반전적이며 도발적인 진실에 다가가려는 개방적 태도를 가져야 한다. 자, 어리석음의 정점에 서있는 존재가 설파하는 어리석음의 근본에 대한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을 만큼 어리석어졌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이제 그 정수를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선 무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죽음 이후엔 무엇이 있는가? 인간은 무엇을 위해 생(生)을 지속해야 하는가? …
세상엔 그 아무리 현명하고 지혜로운 사람을 붙들고 물어보더라도 답을 구할 수 없는 질문들이 존재한다. 스스로 답을 찾아야만 하는 의문들이다. 그러나,
물은 왜 흐르는가? 범람하는 강은 어째서 위험한가? 와 같이 자명한 것들을 묻는 질문들이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질문들은 명확한 해답을 갖고 있다. 따라서 전자에 해당하는 경우엔, 질문에 질문으로 답하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훌륭한 답변이 될 수 있지만, 후자와 같이 저의가 뚜렷한 질문에 질문으로 답하는 것은 그 자체로도 꽤나 어리석다고 할 수 있다. 답이 정해져 있기에 우문현답을 기대할 수조차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쯤에서 한 번 정리하고 넘어가겠다. 어리석은 질문은 무엇인가?
바로 스스로도 답을 얻을 수 있는 질문을 (굳이) 던지는 것이다. 즉 물음 끝에 깨달음이 없는, 실속 없는 문답을 말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무지(無知)하다고 할 수 있다. (*만일 깨달음이 목적이 아닌, 외교, 언쟁, 기선제압과 같은 동기가 목적이었다면, 추측컨대 당신은 훌륭한 웅변가일 것이다.) 기세를 몰아 질문은 더 던져보겠다. 글의 화두에서 던진 질문은 어떠한가? 과연 무지는 죄인가?, 이에 대한 죄를 판가름할 하나의 명답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가?
척도는 없다. 당신의 말과 생각이 곧 법이자 절대적인 진리이다.
당신이 이에 대해 질문에 대한 죄의 유무를 심판해주기 바란다.
ㅡ안타깝지만 나는 당신의 판결을 들을 수가 없기에 나의 견해로 대신하자면, 답은 ‘어리석다’이다. 무지는 자체는 무죄이다, 허나 불행히도 질문은 눈감아 넘어가 줄 수 없을 정도로 어리석다.
무지는 죄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한 대답은, 어떤 개인의 결론이든 타인의 것을 종합하여 결론을 내리는 경우이든, 필연적으로 해석과 전제에 의존한다. 그러므로 서로 다른 가치관, 윤리 체계, 사회 규범이 뒤섞이면, 그 결과는 단일한 보편적 답으로 수렴되지 않는다. 오히려 결론을 내리려는 시도 자체가 또 다른 논쟁의 출발점이 된다. 더더욱 해답은 미궁 속으로 빠져드는 것이다.
결국 이 질문은 애초부터 시비를 가려 결론을 확정할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질문자는 스스로 사고했다면, 이 점을 곧바로 인지했을 것이며, 그럼에도 물었다면 이미 불필요한 답을 구하려 한 셈이다. 그러므로 어리석다고 할 수 있다.
누군가 반론을 제기할 것이라 예상한다. 하지만 혹여 그가 ‘해당 질문에는 유효하고 보편적인 답이 있다’, ‘서로 배치되는 모든 대답이 독립된 정답으로서 동시에 긍정될 수 없다’는 변론의 근거를 찾기란 아마 어려울 것이다.
잘못된 문답과 질문의 어리석음은 마치 이와 같다.
한낱 범인(凡人)의 시선에선 실레노스의 상자(Silenus Box)는 초라하고 투박한 한낱 상자에 불과하다. 범인들은 대장장이 식칼이 논다는 것을 모르는 것인지, 금은보화를 비롯한 갖가지 진귀품들을 눈앞에 두고도 애먼 상자를 연다.
또한 범인들이 놓치고 마는 무지의 진수를 표현하고자, 우신의 말을 빌리겠다.
“아주 높은 전망대에 올라가 인간 세상을 구석구석 내려다보면, 인생이 얼마나 재앙으로 가득한지 알게 될 것입니다. (중략) 인생에서 겪는 일들은 쓰디쓴 것밖에 없습니다. 도대체 인간은 무슨 악행을 저질렀기에 이런 재앙들을 겪는 것인지…”
인간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행복을 좇으며 살아간다. 그리고 행복을 나름대로 정의 내려, 타인에게 전파하고 또는 잃어버리지 않도록 자신만의 문자 속에 가둬두려 한다. 하지만..
“(중략) 하지만 실제로는 행복을 가로막는 장애물일 뿐입니다. 인생의 다른 재앙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에게 온갖 나쁜 것을 가져다주는 정령들이 들여온 것입니다.” 행복을 정형화시키는 것은 자신의 목을 옥죄이는 것과 비슷하다. 나의 행복은 타인에게 있어 불행이 될 수도 있고, 타인의 행복이 나의 불행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나이대에는 어느 정돈 벌어야 노년에 유복하지. 대학까진 졸업해야 안정적인 직장을 얻지.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야 행복하지…” 타인이든 나 자신이든, 누군가 정해둔 행복을 따라가면 진정한 행복을 놓치게 된다. 그러니 우신도 이리 말하는 것이다.
“인생의 가장 달콤한 시절에 허구한 날 밤새우고 노심초사하며 매달렸을 것이며, 남은 삶에서도 아주 작은 즐거움조차 맛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늘 궁색하고 쪼들리고 우울하고 심각했을 것이며, 자신에게 엄격하고 가혹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신랄하고 적대적이었을 것입니다. (중략) 그런데 한 번도 살아 있었다고 할 수 없는 사람이 죽은들 살았던 때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따라서 무지하거나 통달한 현자가 아닌 평범한 사람은 그 둘 사이에서 죽음 이전까지 계속해서 고통받으며 살아갈 것이다. 그러니 판도라처럼 재앙을 열어보고 싶지 않다면, 폐포파립한 상자를 택하는 것이 차라리 차악일 것이다.
앎은 사유나 과학적인 검증에 의해 생산되는 지식을 포함하는 것이 사실이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의미에서, 우신은 진전(眞詮)은 항상 이성적이거나 논리적일 필요는 없다고 밝힌다. 그러니 우린 사회가, 규범이, 그리고 인간이 정한 상한선에서 벗어나, 무지를 택함으로써 진정한 앎을 실천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결론이 무어냐고?
무지는 꽤나 나쁘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나의 헛소리를 들어줄 정도로 어리석어져 줘서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