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애린왕자 읽어봤나?

느그 동네 애린왕자 한 번 만나봐바, 억수로 반갑다!

by Miranda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 책은 누구라도 한 번쯤 읽어봤을 것이다.

사막여우의 "네가 4시에 온다면 난 3시부터 행복해질 거야"라는 예쁜 말과 함께 말이다.


[어린 왕자]라는 책은 내가 어릴 때부터 그냥 집에 있었다.

그래서 언제 읽었는지 모르게 읽었었고 지금도 집에 꽂혀있다.

인터넷상에 떠돌아다니는 [어린 왕자]에 나오는 예쁜 말들도 사실 책을 읽을 때는 그렇게 와닿지 않았었다.

너무 어릴 때 읽어서 그럴 수도 있겠다.


어느 날 인스타그램에서 [애린왕자]라는 책을 보았다.

독일의 어느 출판사에서 세계언어번역프로젝트로 기획되어 우리나라에서는 경상북도 포항과 전라북도, 강원도 방언으로 출판되었다고 한다.

고향은 부산이지만 경북 포항에서 15년째 거주하면서 이제 부산 사투리와 포항 사투리가 반반 섞여 희한한 말을 구사하는 나에게 "어머 이건 사야 해"라는 느낌이 왔다. (결국은 같은 경상도 사투리이긴 하지만 미묘한 억양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서울 사람들은 알지 못할 것이다.)


호기심에 구입한 책이었는데 나도 모르게 처음부터 사투리로 또박또박 읽고 있다.


예를 들모, 오후 4시에 니가 온다카믄 나는 3시부터 행복할끼라. 시간이 가믄 갈수록 나는 더 행복하긋제. 4시가 되모 나는 하마, 안달이 나가 안절부절 몬 하겠제. 내가 얼매나 행복한지 니한테 보여줄끼라.

언어의 힘이 느껴졌다.

[어린 왕자]를 읽을 때 술술 읽어 갔던 문장들이 사투리로 쓰여 있으니 한 자씩 정말 꾹꾹 눌러 읽는다는 느낌으로 천천히 천천히 읽고 있었다.

그리고 어린 왕자의 감정과 심리가 고스란히 와닿았다.

어린 왕자의 호기심의 깊이, 심통 난 정도, 그리움의 정도 등.

그냥 휙 읽고 지나갔던 부분들이 정말 섬세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애린왕자]는 [어린 왕자]보다도 책을 읽는 시간이 곱절은 더 걸린 것 같다.

정말 우리 옆집에 사는 꼬마아이의 감정을 보는 것 같은, 그리고 내가 그 꼬마를 볼 때 느껴지는 감정인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책과 현실의 경계가 무너진 느낌이었다.

기분 좋지만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영어와 같은 외국어를 배울 때 언어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 문화를 배운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다. 물론 방언은 새로운 언어는 아니지만 그 지역의 문화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고 그 방언을 억양을 살려 읽어 내려가는 과정을 통해 책 속의 주인공은 더 이상 허구의 인물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엄마가 이가 아프다고 하셔서 같이 치과에 간 적이 있다. 우리 딸이 치과에 가면 보호자인 내가 옆에 있어주지만 친정 엄마는 어른이라 당연히 엄마 혼자 진료를 보러 들어가시고 나는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보호자 호출을 하는 게 아닌가.

치과에서 보호자 호출을 부를 일이 뭐가 있나 싶었지만 얼른 들어가 보았더니 의사 선생님께서 엄마의 증상을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하시면서 나에게 설명을 해 달라고 하셨다.

우리 엄마는 의사 선생님께

" 잇몸이 아프지는 않고예, 우리~~~~합니더" 라고 하셨고,

의사 선생님은 "잇몸이 아프단 말씀이세요?"라고 되물어보셨다.

엄마는 계속 "아니예~, 아프지는 않코예, 고마 우리~~~ 하다고예" 무한 반복 하고 계셨다.

의사 선생님은 다시 "그럼 잇몸이 괜찮다는 말씀이세요?"라고 물었고

엄마는 "아니예~ 안 괜찮으니 왔지예, 밤만 되면 우리~~~하이 난리굿입니더"라고 답했다.

의사 선생님께서는 어머님께서 아프다는 건지 괜찮다는 건지 모르겠다고 나에게 통역 아닌 통역을 요청하셨다.

무슨 상황인지는 이해가 되었으나 사투리가 모국어인 나에게는 사실 엄마의 통증을 우리~~~하다라는 말 보다 더 잘 표현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나는 의사 선생님께 "잇몸이 아픈 정도는 아닌데 지속적으로 욱신거리는 느낌이 있으신 것 같아요"라고 설명을 드렸다. 다행히 의사 선생님께서 이해하신 것 같았다. 만약 그때 내 말도 이해를 못 하셨다면 나로서도 더 이상 설명 드릴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경상도 사투리 네이티브 스피커인 나는 어릴 적부터 서울말을 동경했었다. 항상 사투리로 대화를 하다가도 소꿉놀이를 할 때는 친구들도 서울말이라 부르는 표준어를 쓰곤 했다. 학창 시절 국어교과서에서 표준어를 교양 있는 사람이 쓰는 말이라는 문장을 보고 그럼 표준어를 쓰지 않는 나는 교양이 없다는 것인가?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사투리를 쓰는 것이 부끄러웠던 적도 있었고 한 번도 자랑스럽다고 생각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그런데 [애린왕자]를 읽으면서 경상도 사투리로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는 것에 놀랐고, 단어 하나하나에 담긴 의미를 정말 오롯이 다 느낀 것 같아서 행복했다. 정말 오랜 타향살이 끝에 고향으로 돌아와 고향사람과 대화하는 느낌이랄까?


느그 서울사람들은 요런거 몬읽제?

나는 서울말도 읽을 줄 알고 사투리도 읽을 줄 아는데.

내 쫌 멋찌제?

점심을 억수로 마이 무가꼬 잠이 온다.

이제 글은 그만 쓸꾸마.


2025.11.04 고향이 부산인 포항 아줌마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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