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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성철 Aug 23. 2020

죄 없는 등을 위해

세상 욕지거리 다 받아먹게 생겼습니다.

비 오는 날 우산을 쓰고 걸어갑니다.

신체의 앞부분에 떨어지는 빗방울은 금방 알 수 있어 우산으로 가려 줍니다. 

신체의 등으로 떨어지는 빗방울은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입고 있는 옷이 비에 젖어 서늘한 느낌이 피부에 닿을 때 비로소 알게 됩니다.     


지인들과 대화에서 나도 모르게  말이 길어질 때가 있습니다. 

조언과 칭찬을 한답시고 진지하게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대화는 마주 보고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인데 말문이 트인 아이처럼 이야기가 길어집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논리도 사라지고 앞뒤 문맥도 엇나가, 술 취한 동네 아저씨의 고집 센 모습을 보여주고 말았습니다. 다음날 후회가 밀려옵니다.  

무슨 말을 그렇게 피를 토하듯이 했나 싶어 정신을 차려 봅니다. 

어젯밤 버스에 실어 보낸 언어들을 후회와 함께 소환해 봅니다. 

열려 있는 차창으로 찬바람이 불어와 스산한 기운 가득 담은 빈 버스만 덩그러니 서 있습니다.

때늦은 후회와 곰팡이 꽃들이 머릿속에 가득 피었습니다. 

어제는 남의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자는 나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내 주장을 앞세워 남의 말을 깡그리 뭉개버렸으니 뒤통수가 근질근질합니다.     


어제는 신체의 뒷부분에 떨어지는 빗방울을 보지 못했습니다. 

매번 조심하지만 등이 흠뻑 젖었습니다. 

신체의 앞부분을 믿고 사는 죄 없는 등이, 

모든 것을 맡기고 묵묵히 따라온 등이, 

세상 욕지거리 다 받아먹게 생겼습니다. 

지금부터라도 듣는 연습을 해야겠습니다.     


사람이 사람 말을 잘 듣지 못하니 오해가 생깁니다. 

군 복무 시절 식사 중인 소대장이 물을 찾는데 라이터를 갖다 주었습니다.  

물을 불로 잘 못 알아들었습니다. 어이가 없다는 듯 쳐다보더군요. 

한동안 ‘말귀 못 알아듣는 이등병’으로 낙인찍혀 살았습니다. 

자기의 주장만 내세우고 남의 말을 건성으로 듣는 습관이 부른 결과입니다.

남의 말을 대충 듣는 오랜 습관이 물을 불로 알아듣습니다. 

이런 습관이 지속되면 물불 가리지 않고 깨진 거울 조각 같은 언어만 남발합니다. 

아침이면 깨진 거울 조각에 찔려 피 철철 흘리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술자리에서 이야기가 길어지는 친구가 있습니다.

그러면, “너 친한 친구 많이 없지”란 농담을 합니다. 

서론을 너무 장황하게 늘어놓는 친구의 이야기 차례가 되면 덜컥 겁이 납니다. 

아! 언제까지 들어야 이야기가 끝날까, 첫마디를 들었을 뿐인데 벌써 지칩니다. 

문제는, 나 자신이 그럴 때 상대방의 생각을 무시한다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등 쪽에 빗방울이 떨어져 옷이 젖고 있는데 말입니다.     


언어의 목적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의사의 정확한 전달과 소통입니다. 

내 주장만 하다 보면 전달과 소통은 멀어집니다. 

소통이 막히면 내 입에서 나오는 언어들은 쓰레기로 보일 겁니다.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길어지고 교육적이면 지적질로 변합니다.     


묵언 수행 중인 스님은 아니더라도,

고해성사를 전담하는 신부님처럼, 

죄 없는 내 등을 위해,

상대방의 끊임없는 넋두리도, 

고해성사라 생각하고 진지하게 듣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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