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명종 때 토정 이지함이 지었다고 전해지는 토정비결이 있습니다.
믿고 사는 건 아니지만 새해가 되면 재미 삼아, 한 해의 운세를 봅니다.
인터넷상에서 신년운세를 보면, 1월에 불조심, 7월에 물 조심, 늘 사람 조심, 조심해야 할 일도 많고 가지 말아야 할 방향도 정해줍니다.
귀인貴人을 만나 재물이 모이고 직장에서 승진을 한다고 합니다.
좋은 일도 생긴다고 하니 기분도 그리 나쁘지는 않습니다.
귀인은 사회적 지위가 높고 귀한 분입니다.
이런 분이 나타나 나를 도와준다고 하니 신년 초부터 기분이 들뜨기도 합니다.
인터넷과 신문 지면에는 ‘오늘의 운세’란 것이 있습니다.
열두 띠별로 그날의 운세를 매일 알려줍니다.
여기서도 일주일에 3번 정도는 귀인이 나타나 나를 도와준다고 합니다.
유원지나 관광지에도 있고 시내의 중심가에 가면 오늘의 운세를 보는 자판기도 있습니다.
천 원을 투입구에 넣으면 또 귀인이 나타나 도와준답니다.
천 원에 최소한 한 명의 귀인이 나타납니다.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단돈 천 원이라 생각하니, 천원이 아깝지 않습니다.
집안에 크고 작은 일이 있으면 유명하다는 점집을 찾아갑니다.
일정 금액을 치르면 부적과 함께 귀인이 나타나 도와준다는 말을 또 듣습니다.
그 외, 사주카페나 타로카페에서도 만난다고 합니다.
친구 놈은 귀인을 만나 결혼했다고 자기 입으로 자랑하고 다녔는데, 요즈음 얼굴이 그렇게 좋아 보이지는 않습니다. (일부러 표정 관리를 하는 건지, 아니면 좋은 것은 자기만 누리려는 욕심인지?)
혹시, 귀인을 관리하는 대형 기획사가 있는지 살짝! 의심도 해봅니다.
이러다 보니 일 년에 대략 300명의 귀인이 나타나 나를 도와주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러다간 협력업체 사람이나 가족보다 자주 만나는 게 귀인입니다.
귀인을 맞이할 접대비는 본예산에 빠져있어 빚을 내 추경예산을 편성해 완벽하게 준비를 합니다.
현재 겪고 있는 가정 경제의 어려움과 내가 궁극적으로 추구할 사회적 위치와 부에 대해 PPT도 준비했습니다.
방향은 거의 50%가 동남쪽에서 귀인이 나타난답니다.
해 뜨는 동쪽과 남쪽의 힘차고 따듯한 기운을 가지고 오는가 봅니다.
나타나기는 하는데 정확한 날짜와 시간은 절대 알려주지 않습니다.
노르망디나 인천 상륙작전의 D-day처럼 특급 비밀인가 봅니다.
인생 역전의 마지막 기회라 생각하고, 나타날 때까지 무조건 기다려야 합니다.
장소라도 알려주면 커피라도 한 잔 시켜놓고 기다리면 됩니다.
장소도 모르니 어디서 기다려야 할지 참 난감합니다.
귀인을 기다리다 지치고 답답하면 다시 점집에 찾아갑니다.
귀인이 왜 나타나지 않느냐고 사장님께 따져 묻습니다.
그러면, 나타났는데 내가 게으름을 피워 잡지를 못 했다 합니다.
그런가 보다 하고 다음 귀인은 언제 오느냐고 물어봅니다.
곧 나타나니 조용히 기다리라는 말에 희망 한 보따리 들고 점집을 나옵니다.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일 년에 300명의 귀인이 나에게 왔다면 나는 벌써 대한민국 최고의 부자가 되었든지,
아니면 권력의 핵심에 있어야 하는데 현실은 변한 게 하나도 없습니다.
지갑을 채우는 건 여전히 천 원짜리 포함 지폐 서너 장뿐 입니다.
피골상접皮骨相接한 지갑도 가정경제도 너무 심한 다이어트 중입니다.
도대체 300명의 귀인은 언제 어떤 모습으로 오는지, 벌써 가을이 끝나 겨울로 접어드는데, 이미 왔다 갔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아니면, 12월 31일 한꺼번에 300명의 귀인이 집으로 찾아와 동시에 초인종을 누를 것인지,
기다리는 나도 궁금합니다. 카드를 긁어서 번호대기표 기계를 사놓아야 할지 고민 중입니다.
그리고 1번 국도로 올 것인지, 3번 국도로 올 것인지, 교통체증이 심해 비행기로 올 것인지,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입니다.
지인들과 술좌석에서 태몽 이야기를 합니다.
나도 어머니께 들은 태몽은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꿈입니다.
공교롭게도 술좌석 여섯 명의 태몽이 모두 용꿈이랍니다.
그 당시 제일 높은 시청률이 꿈속에서 보는 용꿈이었나 봅니다.
어쨌든, 여섯 마리의 용이 술을 마시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현실의 육룡은 술값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신들의 이야기는 과학적으로 증명하는 게 아니라 합니다.
신들의 영역을 인간이 증명하려는 것은 괜한 시간 낭비입니다.
어머님의 태몽도 증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식들이 희망과 꿈을 가지고,
주어진 삶을 행복하게 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 어머님의 태몽입니다.
귀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귀인을 기다리지 말고,
찾으려 다니지 말고,
내가 귀인이 되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
따듯한 말 한마디가,
그들에게 작은 힘이 될 것입니다.
이 작은 힘이 쌓이고 쌓이면,
나는 수천수만의 귀인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이만하면 성공한 인생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