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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나!! 당신 그 귀한 벼락을 맞으셨네!
연식이 오래된 당신
by
최성철
Aug 25.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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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어컨 실외기가 사과가 아니라 쇠 깎는 소리를 냅니다.
지난여름을 겨우 버텨 왔는데 팬 돌아가는 소리가 심상치 않습니다.
무더위는 연일 최고온도를 갈아치우고 또 다른 정점을 항해 숨 가쁘게 내달리는데,
실외기는 혀를 축 늘어뜨리고 마지막 숨소리로 그르렁그르렁 합니다.
간간이 뉴스에서 아파트 에어컨 실외기에서 화재가 발생했다는 소식을 전해줍니다.
평소에 좋아하던 아나운서인데, 너무 남의 일처럼 말합니다.
숨이 넘어갈 듯한 더위에, 화재의 위험까지 안겨 주는 여름이 두렵기만 합니다.
속은 타고 입은 텁텁해, 냉커피를 타 먹으려고 쌍문형 냉장고 냉동실 문을 열었습니다.
(여기서 냉장고가 쌍문형이라고 강조를 해야 하나?)
이틀 전에 사놓은 얼음은 간데없고 물만 한 그릇입니다.
얼음을 만들려고 그릇에 물을 담아 놓은 줄 알았습니다.
15년을 사용한 냉장고가 제 기능을 상실했습니다.
작년에도 서비스를 받았는데 또 말썽입니다.
냉동실은 오래된 음식물이 녹아 썩은 냄새를 보관하고 있습니다.
여름철 가장 중요한 두 가전제품이 문제를 일으킵니다.
가족이 모여 회의를 합니다.
애들은 “알아서들 하시오” 하고 각자의 방으로 들어갑니다.
친구들과 술집에서 안주를 시킬 때 친구가 뭐 먹을래 하면, 나는 “아무거나”라고 말합니다.
닮았습니다! 성의 없이 말하는 게 어찌 그리 닮았는지!
그렇다고 사자처럼 더위를 잘 견디는 건강한 놈만 키울 수는 없지 않습니까?
결국, 아내와 마주 앉아 냉장고와 에어컨 구매에 대해 의논을 합니다.
다른 건 몰라도 화재 발생 위험 때문에 교체하기로 합니다.
세 군데 전자제품 점을 방문해 가격 대비 성능을 비교하고 냉장고와 에어컨을 구매했습니다.
다음 날, 냉장고와 에어컨이 집으로 들어오고 에어컨 실외기 돌아가는 소리가 자장가를 닮았습니다.
돈을 들이니 사과 깎는 소리가 납니다.
베란다에 설치한 에어컨 실외기 위 건조대에 빨래를 늘려고 하니 아내가 다급하게 뛰어옵니다.
실외기에 물 떨어진다고 빨래를 저 멀리 널라고 언성을 높입니다.
저번 실외기는 베란다 바깥에 설치해 10년 동안 비바람을 맞고 견뎠는데, 탈수까지 한 빨래가 물이 떨어지면 얼마나 떨어진다고 고함을 지르는지, 더 억울한 것은 일을 도와준다고 빨래도 내가 했는데.
그 순간 15년 전의 일이 떠오릅니다.
경제적인 여유가 없어 중고차만 구매해 타고 다녔습니다.
그 차마저 잦은 고장으로 수리비가 만만치 않아 고민 중이었습니다.
“우리도 새 차 한 번 타 보자! 언제까지 중고차만 타고 다닐래!”
아내의 말에 힘을 얻어 내 인생 최초로 그것도 중형으로 새 차를 샀습니다.
몸무게는 소형인데 중형으로, 70%는 현금 30%는 할부로, 투잡을 생각해 대형 버스를 사려다, 출퇴근용으로 적합하지도 않고 내가 다니는 회사 주차장이 협소한 관계로 중형으로 결정.
주말에 새 차를 산 기념으로 아내와 함께 드라이브 코스로 유명한 전라남도 영광군에 위치한 백수해안도로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출발 시에는 비가 내리지 않았는데 목적지가 가까워지자 제법 굵은 비가 내립니다.
휴게소에 들러 우산도 없이 비를 맞고 먹을 것을 사 차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아내가 화를 냅니다.
하필이면 이런 날 날을 잡았다고, 비가 오니 운치도 있고 좋지 않냐 했습니다.
그러자 아내는 새 차가 비에 젖고 흙탕물이 차에 튄다고 화를 냅니다.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연식이 오래된 나는 비를 맞고 휴게소에서 간식거리를 사 왔는데,
비 맞은 나는 뒷전이고 새 차가 비를 맞고 있는 것이 마음이 더 아프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연식이 오래되면 비를 맞든 우박을 맞든 관심 밖의 일인가?
막말로 내가 벼락을 맞으면,
“어머나!! 당신 그 귀한 벼락을 맞으셨네! 로또나 사야겠다!”
이런 표현을 하고도 남을 사람처럼 보입니다.
아! 나는 무엇이라 말인가!
새 차에 밀리고, 냉장고에 밀리고, 에어컨 실외기에 밀리고,
냉수 한 잔 마시고 냉장고 문을 조금 세게 닫았습니다.
웬걸, 아내의 입과 눈이 올림픽에서 과녁을 겨냥한 양궁 선수의 형태입니다.
뒤돌아서는 뒤통수에 아내의 잔소리가 화살촉으로 박힙니다.
돈을 지불한 나보다 가전제품이 우선인, 치사한 자본주의의 인간성을 봅니다.
물질만능주의에 살고 있음을 새삼 느껴보는 여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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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와 좋은 글을 찾아 지구를 떠도는 시인입니다. 첫 시집 『신의 가마에 불 지피다』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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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난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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