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내 세상이다

1. 네 엄마 죽었단다.

by 걍보리

하늘은 크고 들은 넓고 산들은 아득하였다. 어린 시절 나는 그곳에서 자랐다. 노안 금성산 중턱에 있던 외갓집이었다.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숲 속에 있는 작은 초가집이었다. 산꼭대기에서 내려오는 큰 산등성이에 지은 집이어서 먼 곳에서도 쉽게 볼 수 있었다. 울도 담도 없는 초가집은 마치 초록 숲의 바다에 뜬 노란 섬 같았다. 사람이 거의 다니지 않는 곳이었다.

어쩌다 찾아온 사람은 방안을 조심스럽게 기웃거렸다. 외진 데서 어떤 사람이 무얼 하면서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하였다. 그들은 마루에 앉아 보고, 마당에 서 보고, 하늘과 땅이 광활하게 펼쳐진 모습을 보았다. 좁은 마당 가장자리에 서서 나직하게 탄성을 지었다. 아마 가슴이 툭 터지는 기분을 느꼈을 것이다. 나무꾼이나 가끔 다니던 길은 외가가 들어선 뒤에 차츰차츰 일반인이 다닐 수 있는 길로 바뀌었다. 그 길은 외갓집에서 끝났다.

그곳에서는 시야가 완전히 열렸다. 눈을 들어 정면을 보면 그 끝을 가늠하기 힘들었다. 정면은 물론이고 좌에서 우로 180도가 넘는 각도가 모두 막힘이 없었다. 아스라한 지평선 너머로 크고 작은 산들이 거대한 나주평야를 감싸고 물결치는 풍광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집이 높은 곳에 있었던 까닭에 산꼭대기까지 가는 일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산꼭대기에서는 멀리 서해바다도 볼 수 있었다. 거기에는 바람이 불었고 나무가 없었으며 풀만 잔뜩 자라고 있었다. 나중에 군사기지가 들어선 뒤로는 민간인이 갈 수 없었다.

집에서 아래쪽을 내려다보면 산자락을 따라 굽이굽이 비포장 길이 나 있었다. 그 길을 따라 하루에 한두 번 정도 버스가 지나갔다. 뽀얗게 흙먼지를 날리며 노란 실선 같은 길을 따라 움직이는 버스는 작은 장난감처럼 보였다. 논이나 밭에서 이리저리 자리를 옮겨가며 일하는 사람들을 또렷하게 볼 수 있었다. 마치 개미가 꼼지락거리는 것 같았다. 들에서 일하는 사람들 중 시력이 좋은 사람은 내가 집 마루에 앉아 있거나 마당에 서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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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열 살이던 해 여름 어느 날, 군인 한 명이 찾아왔다. 외할머니가 불렀다.

“네 아빠다. 인사해라.”

아버지란 존재를 모르고 자란 내게 ‘아빠’란 말은 익숙하지 않았다. 몹시 낯설고 어색했다. 내게는 아빠라는 말이 없었기에 아빠가 없었다.

‘누구지?’

경계심을 가졌다. 절을 하는 둥 마는 둥 하였다. 이 사람 저 사람 눈치를 살폈다. 마당과 어른들 주변을 맴돌다 슬쩍 그 자리를 벗어나 버렸다. 그는 나를 부르지 않았다. 나도 그의 곁에 가지 않았다.

‘그가 왜 왔을까? 어디서 왔을까?’

그가 그 깊은 산속까지 찾아온 이유를 몰랐다. 궁금하지도 않았다. 언제 돌아갔는지도 모른다. 전혀 기억에 없다. 다음 해에 어머니가 동생을 낳았다.

열한 살이 되던 해 겨울 어느 날. 법성에서 친할아버지가 노안 산속을 찾아왔다. 그곳까지 찾아오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안방에서 어머니를 비롯하여 어른들이 모여 앉아 이야기를 하였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열한 살이 되도록 학교에 다니지 않았던 나의 장래를 염려하고 학교에 보내기 위해 어른들이 만났던 모양이다.

어머니는 내게 어두운 갈색 코르덴 바지에 스펀지가 들어있는 진한 감청색 점퍼를 입혀 주었다. 먼 길 가는데 춥지 않을까 걱정을 많이 하였다. 갈색 두루마기에 반짝이는 구두를 신고 진갈색 중절모를 쓴 할아버지를 따라 법성으로 갔다.

‘그때 어머니는 내게 무슨 말을 했을까?’

‘외할아버지나 외할머니는 또 무슨 말을 했을까?’

아무 말도 안 했을 것 같지 않다. 그러나 기억나는 것이 없다. 그냥 얌전하게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

‘그때 어머니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헤아리기 어렵다. 그 길이 어머니와 나의 이별 길이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겠는가?

법성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 신두암 집으로 가던 그날은 눈이 많이 내렸다. 드문드문 눈이 덮인 들녘에 어둠이 밀려오고 진눈깨비가 휘몰아치는 가운데 질척거리는 황톳길을 걸어 할아버지 집으로 갔다. 황토가 검정고무신에 달라붙어 발이 무거웠다. 신발은 벗겨지려 하면서 철떡거렸다. 발은 시리고 바지는 흙투성이가 되었다. 우산도 없이 걸었기 때문에 두꺼운 겨울옷이 흠뻑 젖었다. 추웠다. 길가에 늘어선 나무 전봇대 위, 두 가닥의 긴 전선줄은 칠산 바다 쪽에서 불어오는 맹렬한 바람을 맞아 윙윙거렸다. 그 소리는 몸을 더 움츠리게 하였다.

신두암은 일곱살 이전에 살아본 적이 있었던 곳이기에 낯설지 않았다. 안방에서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지냈다. 북쪽으로 놓인 마루는 넓고 깊었다. 텃밭 쪽으로 난 문이 작아 한낮에도 어두침침하였다. 나는 할아버지 옆에서 잤다. 할아버지는 새벽이면 일찍 일어나 담배를 피웠다. 성냥을 그어 불을 켜면 ‘파아’ 소리와 함께 방안은 잠시 붉은 기운을 띠었다. 곰방대에 불이 붙으면 입으로 훅 불어 성냥불을 껐다. 안방 문 위 유리액자에 고양이 그림이 들어있었는데, 불빛을 받으면 유리액자 속의 고양이들이 금방 튀어나올 것 같았다. 성냥불이 꺼지면 금방 다시 어두워졌다.

어둠 속에서 할아버지는 엎드린 채 담배를 피웠다. 구수하였다. 할아버지를 따라 일어나 꼼지락거리면, 가끔 수수께끼를 냈다. 나를 시험해 보는 것 같았다. 도란도란 옛날이야기도 해 주었다. 할아버지는 이것저것 아는 것이 많았다. 시끄러워 늦잠을 잘 수 없었던 할머니는 짜증을 내곤 했다. 동이 트기 전에 할아버지는 삽을 들고 논으로 나갔다. 밥 먹을 때가 되면 돌아왔다. 대문 쪽에서 마당으로 흘러드는 가벼운 기침 소리로 할아버지가 논에서 돌아온 것을 알 수 있었다.

할아버지는 노래를 좋아하였다. 손아래 처남인 두수 할아버지와 함께 북을 치며 판소리를 하거나 시조를 읊었다. 장화홍련전이나 흥부전 또는 만담을 담은 레코드를 틀어놓고 즐겼다. 할아버지는 그것들을 반복해서 듣고 또 들었지만 내게는 별로 재미없는 내용들이었다.

당시에 두 살 위의 막내 고모는 6학년이었다. 언니 오빠가 자취를 하는 광주로 진학하기 위해 공부를 열심히 하였다. 중학교 입학시험을 준비하느라 노래도 숫자로 불렀다. ‘244 5844 44443........(백두산 뻗어내어 반도 삼천리......)’ 고모는 공부를 열심히 하여 명문 여자중학교에 합격하였다. 법성초등학교의 자랑이었다. 고모가 노래를 많이 부른 덕분에 나는 고학년이 되어야 배울 수 있는 노래들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일곱 살에 입학식만 하고 4년 동안 학교를 다니지 않았기 때문에 초등학교에 재등록을 하였다. 학년을 건너뛰고 1년을 꿇려 4학년으로 편입하였다. 함께 입학했던 동년배는 5학년이 되어 있었다. 5학년 1학기 때까지 1년 반 동안 법성초등학교에 다녔다. 5학년 2학기 때 사촌 형과 함께 광주로 전학하였다.

학교가 파한 뒤나 학교에 가지 않는 날은 내 또래의 아이들과 어울렸다. 자치기 땅따먹기 삐비 뽑기를 하면서 놀았다. 동네 형들은 구슬치기나 딱지치기를 하면서 놀았는데, 잘 놀다가도 수가 틀리면 코피가 나도록 억세게 싸웠다. 험한 욕설도 함부로 내뱉었다. 그런 형들이 무서워서 그들 곁에는 잘 가지 않았다. 어떤 날은 동네 형들이 아이들을 떼거리로 몰고 샛강으로 수영을 하러 갔다. 아이들이 종종 강에 빠져 죽는 일이 있어서 어른들은 샛강에 가지 말라고 야단을 치곤 했다. 거기에는 사람을 잡아가는 물귀신이 있다는 말에 조심스러웠다. 물에서 놀면서도 깊은 곳으로 가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어떤 때는 할아버지가 사촌형과 나를 불렀다. 개구리를 잡아 오게 했다. 논에 가서 개구리를 찾으면 꼬챙이로 개구리 등을 찍어 눌러 잡았다. 가느다란 막대로 개구리턱밑을 쑤시고 뚫어서 꾸러미를 만들었다. 어느 정도 잡았다 싶으면 주렁주렁 매달고 집으로 가지고 갔다. 할아버지는 개구리 삶은 물을 약으로 먹었다. 동갑내기 사촌형과 나는 삶은 개구리의 부드러운 다리를 뜯어먹었다. 닭고기 맛이었다. 가을에는 논에서 벼메뚜기를 잡았다. 강아지풀로 메뚜기 등판을 꿰어 꾸러미를 만들었다. 집으로 가져와 날개를 뜯어내고 간장을 조금 부어 작은 무쇠솥에 볶아 먹었다. 고소하였다.

그동안 어머니와 젖먹이 동생은 노안 산에 남았다. 동생은 많이 아팠다. 제대로 치료받지 못했다. 포대기에 싸서 업어주었던 동생은 내가 법성으로 간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다. 그 말을 전해 들었어도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삶이 무엇이고 죽음이 무엇인지에 대한 아무런 개념이 없는 철없는 아이였다. 내 아래로 세 명의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슬픔을 헤아리지 못하였다. 방학이 되어 외갓집에 갔을 때 동생의 무덤자리가 궁금하였다. 장소를 물었지만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애도의 시간을 갖지 못했다.

5학년 겨울방학 때 어머니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병의 원인에 대하여 이런저런 말들이 있었다. 내가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화병이라는 말이었다. 왜 화병이 생겼을까? 세월이 흐른 뒤에야 그 이유를 제대로 알 것 같았다. 아버지의 무책임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날은 1969년 음력 정월 초이레였다. 서른세 살이었다. 그때 나는 광주 방림동에서 자취를 하는 친척들과 함께 지내고 있었다.

어느 날 광주 서동에서 가게를 하시던 어머니의 작은 아버지 집으로 놀러 갔다. 가게를 보고 계시던 어머니의 작은 어머니가 나를 보자마자 말하였다.

“종구야, 네 엄마 죽었단다.”

내가 그 집에 가기 전날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우연히 그다음 날 거기에 가서 소식을 들은 것이다. 그 말을 듣고도 슬프지 않았다. 울지도 않았다.

‘엄마가 죽었다고? 엄마가 더 이상 세상에 없다고? 당연히 있어야 할 엄마가?’

전혀 현실로 다가오지 않았다. 한 인간의 죽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젊은 어머니의 죽음이 세상에 남아있는 어린 아들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전혀 몰랐다.

그날 저녁 어머니의 작은 아버지 손에 이끌려 어두운 금성산 산길을 올랐다. 늘 놀던 길이었지만 전등이 없어 어둠 속에서 터덕거렸다. 태평사 근처를 지나는 길은 울퉁불퉁한 바위가 많아 낮에도 걷기 힘든 곳이었다. 구불구불한 솔숲 길을 헉헉대며 걸었다. 소나무 숲을 지나고 호랑가시나무와 맹감나무가 많은 구역을 통과하였다. 조금 더 걷자 크고 작은 관목 사이로 멀리 희미한 불빛이 보였다. 외갓집에서 이백여 미터 내려온 지점에 있던 이웃집이었다.

외숙모님의 이야기에 의하면,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전에 거처를 옮겼다. 하루하루 몸이 무거워지자 죽음을 예감한 것일까? 어머니는 외할머니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엄마, 나 친정집에서 죽기 싫어. 아랫집의 작은 방으로 옮겨 주세요.”

잠자리를 옮긴 뒤 어머니는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하였다. 손아래 올케인 외숙모에게도 큰절을 하였다. 그동안 고마웠다고 하면서. 다음 날, 식사 때가 되어도 어머니가 나타나지 않았다. 외숙모가 그 방에 가 보았다. 어머니가 자고 있었다. 어머니를 흔들어 깨웠다. 일어나지 않았다. 잠자듯 세상을 떠난 것이다.

어머니의 몸이 눕혀져 있는 관은 바로 그 방에 있었다. 흙벽에 하얀 종이를 바른 어둡고 작은 방이었다. 내가 그 집에 도착했을 때, 외할머니 홀로 관 옆에 앉아 있었다. 나무 관 옆에는 어른 엄지손가락보다 조금 더 굵은 하얀 양초 하나에 불이 켜져 있었다. 흔들리는 촛불의 움직임을 따라 얼룩진 벽과 나무관 주변으로 주황색 빛과 회색 그림자가 일렁였다. 외할머니가 관 뚜껑을 열어 어머니의 얼굴을 보여 주었다.

하얗고 동그란 얼굴의 어머니가 깊은 잠을 자고 있었다. 아주 편하게 자고 있었다.

‘이렇게 편하고 자고 있는데, 죽었다고?’

이해할 수 없었다. ‘엄마’ 하고 흔들어 깨우면 금방 일어나서 ‘우리 종구 왔네.’라고 할 것 같았다. 믿어지지 않았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몸이 울기 시작했다.

‘엄마는 저렇게 편히 자고 있는데 몸이 왜 울지?’

들썩이는 어깨를 멈추려고 했지만 멈춰지지 않았다. 뜻대로 되지 않았다. ‘엄마, 엄마’ 부르면서 우는 데도 어머니는 일어나지 않았다. 외할머니가 관 뚜껑을 다시 닫았다.

“내 새끼야, 내 새끼야. 너를 어찌할 거나, 너를 어찌할거나.”

외할머니가 나를 안고 몸부림을 쳤다. 어머니의 관 옆에서 외할머니와 함께 밤을 새웠다. 울다가 졸고, 졸다가 울었다. 목이 쉬고 힘이 들어 울음을 그치고 싶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냥 울음이 나왔다. 외할머니는 나를 끌어안고 쉬이 놓지 않았다.

다음날 군대에 갔던 금용 작은 외삼촌이 누나의 장례식을 위해 휴가를 나왔다. 늦은 밤중에 도착하였다. 잠결에 삼촌의 목소리를 들었다.

“우리 착한 누나를 어떤 새끼가 죽였지? 어떤 나쁜 새끼가 우리 누나를 죽였지?”

작은 외삼촌이 매형을 겨냥하여 낮은 음성으로 으르렁거렸다. 아버지는 별다른 말을 안 했다. 외삼촌은 나를 끌어안고 울었다.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나지막하게 ‘누나, 누나’ 하면서 흐느꼈다. 나는 눈을 감고 있었다. 외삼촌의 눈물이 내 목덜미를 타고 흘러내렸다. 나의 눈물이 그의 눈물과 섞였다.

장례식은 간소하였다. 외가 식구와 아버지 외에 그곳까지 일부러 찾아온 조문객은 거의 없었다. 순하고 인정 많았던 어머니를 추억하고, 어머니의 죽음을 슬퍼할 사람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교통이 불편하여 그 높은 산속까지 오기 힘들었을 것이다.

차가운 겨울 아침, 싸락눈이 내리는 가운데 아랫마을에서 올라온 사내들이 상여를 만들었다. 초록빛 대나무를 낫으로 가늘게 쪼개 반원형 형태로 구부린 뒤 새끼줄로 나무사다리에 묶었다. 그 위에 하얀 백지장을 발라 비닐하우스 모양의 작은 상여를 만들었다. 간신히 관이 들어갈 크기였다. 초라하였다. 가끔 보았던 일반 상여와 모양이 달라 상여 같지 않았다.

정오 무렵에 하늘이 맑게 갰다. 대여섯 명의 사내가 금성산 꼭대기 근처까지 관을 들고 올라갔다. 나는 어른들을 따라 상여 뒤를 따라갔다. 상여꾼들의 상여소리도, 슬피 우는 호곡 소리도 없었다. 길도 없는 숲 속을 지나 산꼭대기 근처까지 상여를 들고 가는 일은 쉽지 않았다. 낫으로 잡목을 자르고, 큰 나뭇가지를 꺾고, 가시나무를 걷어내는 소리가 숲 속 주변으로 퍼졌다. 길을 내며 관을 옮기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모든 일은 조용한 가운데 진행되었다.

무덤자리는 가파른 산등선에 있었다. 미리 올라가 있던 사람들이 무덤자리를 파놓은 채 관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관이 도착하자 인부들은 무덤자리와 관을 맞추기 위해 흙을 더 파거나 부족한 곳을 채웠다. 그들은 작업을 하면서 이런저런 의견을 나누었지만, 함께 갔던 가족들은 모두 말이 없었다. 마치 침묵하기로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그때 그 자리에 있었던 친인척들이 누구누구였는지 기억에 없다.

어머니가 쓰시던 숟가락과 젓가락을 유품으로 관과 함께 묻었다. 후일 어머니 산소에 갈 때마다 그 숟가락과 젓가락이 떠올랐다.

‘외할아버지는 왜 그것을 무덤에 넣으셨을까?’

그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하였다. 봉분이 다 만들어지자 어른들이 내게 인사를 하게 했다.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큰절을 두 번 하였다. 하지만 울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어머니는 어딘가에 여전히 살아있을 것 같았다. 분명히 관 속에 누워있는 것을, 또 무덤이 만들어진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으면서도, 어머니가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나중에 내가 힘들어지고 어머니의 빈자리가 느껴졌을 때, 비로소 어머니가 내 곁에 안 계신다는 것을, 정말로 돌아가셨다는 것을 실감하였다. 삶이 무거워지면서 몸은 제대로 자라지 못했고, 마음은 어둠 속을 헤맸다.

외할아버지는 큰딸의 무덤자리를 금성산 꼭대기 바로 밑에 잡았다.

‘왜 그랬을까? 쉽게 찾아오기도 힘든 이곳에 묘지를 쓰게 한 까닭은 무엇일까?’

그곳에서 몇 걸음만 옮기면 바로 산 꼭대기였다. 그 무덤자리는 어머니의 유일한 피붙이인 나를 잘 살게 해 주는 기운이 있는 곳이라고 믿으신 것이 아닐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자리에 서면 오른쪽 한 시 방향으로 멀리 무등산이 앉아 있다. 거기에서 좀 더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영산강이 흐른다. 강물에 햇빛이 반사되면 큰 거울처럼 반짝인다. 정면으로는 아스라하게 넓은 들이 펼쳐진다. 시선이 끝나는 곳에서는 하늘이 땅에 꽂힌다. 들판 위로는 굵고 까만 실선 같은 기차가 긴 기적 소리와 함께 연기를 내뿜으며 달렸다.

어머니는 여전히 그곳에 있다. 어머니는 산과 하나가 되었다. 금성산을 보면 어머니를 만나는 것 같다. 어머니가 보고 싶으면 그 산을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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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광주에서 자취를 하던 삼촌과 고모 그리고 사촌 누나와 형 사이에 얹혀 지내면서 초등학교를 졸업하였다. 중학교 때는 광천동에서 살았다. 함께 지내는 사람이 수시로 바뀌었다. 동거인은 자주 바뀌었지만 나는 늘 가난하였는데, 그들 중에서 가장 가난하였다.

시험을 치를 때면 행정실 직원이 답안지 위에 붉은 도장을 찍고 갔다. 납부금 미납을 확인해 주는 도장이었다. 납부금을 내지 않은 학생에게 보내는 경고 표시였다. 어떤 때는 4층 복도 중앙에 있던 교장실로 불려 갔다. 서너 명의 학생이 열중쉬어 자세로 섰다. 안경을 쓴 늙은 교장이 납부금을 빨리 내라고, 너희들 때문에 못살겠다고,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나의 처지를 알고 말하는 것일까? 학교를 다니지 말라는 말인가?’

나는 그의 말을 귓등으로 흘렸다. 그의 거친 말은 내 마음 밖에 머물다 사라졌다. 아무런 변화도 주지 못했다. 어차피 납부금을 낼 수 없었다.

그럴 때마다 담임선생님이 조용히 불렀다. 다른 생각하지 말라고, 그냥 학교에 다니면 된다고, 성실하게 공부만 하면 된다고 말했다.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그럴 때면 무언가 울컥하고 가슴에 치미는 것이 있었다. 그 표정을 숨기기 위해 고개를 깊게 숙였다. 선생님들은 여러 방식으로 나를 보호해 주고 격려해 주었다. 장학금을 타게 해 주었다. 돈과 관련된 사항이 있으면 늘 나를 우선 면제 대상에 올려주었다.

집에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납부금 고지서나 ‘납부금’이라는 말을 쓴 쪽지를 밥상에 남겨 놓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받아줄 사람은 분명하지 않았다. 실제로 납부금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하지 않았다. 늘 두통에 시달렸다. 먹는 것도 입는 것도 항상 부족하였다. 사는 것 자체가 힘들었다. 집 같지 않은 집이 싫었다. 그래도 어디 갈 곳이 없었다.

집에서는 거의 입을 열지 않았다. 반대로 생각은 많아졌다. 세상에 대한 의문이 쏟아졌다.

‘나는 왜 태어났을까?’

‘꼭 살아야 하는 걸까? 죽어버리면 모든 것이 편해지지 않을까?’

‘나는 어디로 가야 하지?’

고등학교 1학년 때 가출하였다. 입학한 지 보름 만이었다. 새로운 세상을 찾아 나섰다. 반복되는 의문을 가슴에 안고.

‘나는 누구인가?’, ‘왜 사는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놀랍게도 이 질문은 내 가슴속에 아직도 살아 있다.


**********


나는 지금 여기에

왜 이렇게 있는 걸까?


평범했던 일상이 새삼스럽다.

친숙했던 주변이 문득 낯설다.


이렇게 살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

혼란스럽고 불안하다.


나는 어디서 왔을까?

어디로 가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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