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고 달고 시고 맵고
< 들어가며 >
사랑은 마음의 꽃이다. 아름답다. 따뜻하다. 나는 사랑을 꿈꾼다. 그래도 사랑을 이야기하기가 조심스럽다. 온전히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용기를 내본다. 배추씨만 한 사랑이라도 해 본 사람이라면 그것을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사랑은 공기를 닮았다. 공기처럼 모든 사람에게 필요하다. 함부로 쓰여 특별한 의미를 낳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흔하고 낡은 말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사랑이 결핍되는 순간 고통이 뒤따른다. 있을 때는 잘 못 느끼지만, 없으면 바로 춥다.
큰 사랑도 있고 소박한 사랑도 있다. 사랑마다 색깔도 다르다. 어느 경우이건 사랑은 사랑이다. 죄인도 사랑할 수 있다. 죄 속에서도 순수한 사랑에 목말라하는 모순의 존재가 사람이 아닌가?
살면서 좋아하는 사람을 많이 만났다. 싫어하고 미워하는 사람도 있었다. 사랑과 미움의 폭과 깊이는 다양하였다. 이런 나의 감정을 알아챈 사람도 있었고, 아무것도 모른 채 지나친 사람도 있었다. 내가 내 마음의 경계를 넘지 못하였듯이, 그들도 그들 마음의 경계를 넘지 못하였다. 나는 내 세상을 살았고, 그들은 그들 세상을 산 것이다. 마음의 경계를 완전히 무너뜨리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을까? 어쩔 수 없는 사람의 한계이다.
대체로 미움은 생명을 좀먹는다. 오래도록 그 진실을 깨닫지 못하고 살았다. 미움을 내려놓은 뒤에야, 그 미움에 묶여 어리석게 살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묵은 미움을 내려놓자 편하게 숨 쉴 수 있었다. 소통할 수 있었고 외롭지 않게 되었다. 내가 미워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인간적인 한계와 시대 상황에 갇혀 살면서 내게 상처를 주었다. 나 역시 나의 한계를 넘지 못하여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잘못을 저질렀다.
부모는 아이에게 많은 사랑을 주는 사람이다. 하지만 많은 상처를 주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부모뿐만 아니다. 우리는 가까이 있는 사람으로부터 도움도 받고 상처도 받는다. 피할 수 없는 현실이 아닐까?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서툰 글을 쓰는 까닭이 있다. 내 안에서 오래도록 울고 있던 어린 나를 온전히 기억하고 위로하고 싶었다. 더 늦기 전에 내면 아이를 돌보고 싶었다.
학생 시절 동안 내게는 주된 양육자가 곁에 없었다. 어머니는 일찍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나와 함께 살지 않았다. 무책임하기도 하였다. 그를 향해 쏜 분노의 화살은 그에게 도착하지 않았다. 부메랑처럼 되돌아와 나를 괴롭혔다. 오래도록 우울하였다. 비록 동거인들의 배려가 있었지만 정서적 경제적 결핍은 피할 수 없었다.
정서적인 면에서 고아로 자랐다. 내 감정과 생각을 진실하게 드러낼 수 없었다. 어려워졌을 때 되돌아갈 곳이 없다는 생각에 늘 주춤거렸다. 활기차게 나아가지 못했다. 이런 태도는 평생에 걸쳐 지속되었다. 그것을 늦은 나이에 깨달았다. 이미 되돌릴 수 없었다.
결혼 전까지 나를 지배한 기본 정서는 좌절과 분노, 불안과 우울이었다. 훗날 결혼을 하고 아이를 기르면서 조금씩 극복할 수 있었다.
가엾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고통 없이 사는 사람이 있을까? 힘든 순간은 자신의 모습을 잘 볼 수 있는 진실의 순간이기도 하다. 오래도록 주변 사람들을 이해할 기회나 시간을 갖지 못하고 살았다. 곁에 온 사람들을 따뜻하게 감싸 주지도 못했다. 옹졸하고 비겁하고 부끄러운 부분을 기억하는 것은 아직도 힘들다. 나는 내 그릇크기만큼 살 수밖에 없었다. 그것들이 내 모습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그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한다.
밉건 곱건 글에 나오는 사람은 모두 내 세상을 찾아온 손님들이다. 그들이 없었다면 나의 삶은 색깔도 모양도 없이 초라하였을 것이다. 그 점에서 나는 그들에게 감사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마음 깊이 용서를 구한다. 갈등 관계에 있던 사람들과 마음으로나마 다툼을 풀고 싶다. 용서해 주고 싶고 용서받고 싶다. 화해와 사랑을 꿈꾸어 본다. 모두의 평안을 기원한다.
‘바위에 앉은 푸른 이끼처럼 늘 평안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