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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걍보리 Nov 22. 2023

숲길에서

15. 울루와뚜(Uluwatu)

  늘 보던 바다가 아니었다.  먼 바다에서 어깨동무를 하고 출발한 에메랄드빛 너울이 긴 모래사장에서 하얀 포말을 만들면서 한꺼번에 부서졌다. 서핑에 적합한 파도라는 말이 실감 났다. 깊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어두운 쪽빛의 에게해(海)나, 친근하게 다가오는 푸른빛의 동해와는 달랐다. 연한 연두에서 짙은 푸른색으로 점차 짙어지면서 펼쳐지는 발리 남부 판다와 해변(Pandawa Beach)의 바다는 신비로웠다. 좁쌀이나 쌀알크기의 연갈색 모래는 고창 만돌 해변이나 제주 함덕 백사장의 모래와는 발바닥에 닿는 촉감이 달랐다. 바람이 없어도 파도가 높아 수영은 힘들 것 같았다. 연두색의 긴 이랑이 연달아 밀려오는 바다와 하얀 파도가 모래사장과 어울려 만들어내는 풍광은 황홀하였다.  

  짙은 하늘색의 블루라군 칵테일을 마시면서 수아르에게 물었다.

  “아들을 꼭 낳을 필요가 있었나요?”

  “그럼요. 내 뒤를 이어 제사를 지낼 사람이 있어야 하거든요.”

  “딸이 제사를 지내면 안 되나요?”

  “딸은 결혼을 하면 남편집의 제사를 지내야 합니다. 조상님을 모시는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아들이 있어야 합니다.”

  “만약 부부 사이에 아들이 없으면 어떻게 하지요?”

  적절한 응답이 어려웠을까? 그가 어색하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러면 곤란합니다. 저는 아들을 얻기 위해 늦둥이를 보았답니다. 아내가 힘들었지요. 대개 제왕절개 수술을 두 번 이상 하면 안 된다고 하더군요. 그래도 제 아내는 세 번이나 수술을 했어요. 운이 좋아 두 딸에 이어 세 번째로 아들을 낳았지요.”

  그는 ‘아내에게 미안했다.’는 말을 여러 번 반복하였다. 그의 아내에 대한 사랑과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의문을 가졌다.

  ‘자기 아내에게 정말 미안했다면, 먼저 낳은 두 딸만 잘 기르면 되지 않았을까? 왜 위험을 무릅쓰면서 아내가 세 번째 제왕절개 수술까지 하게 했지? 자신의 신념을 내려놓기가 싫었던 것은 아닐까? 만약 아내가 크게 아프기라도 했다면 어쩔 뻔했는가? 도대체 아내의 생명과 자신의 신앙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했단 말인가? 내게는 신앙보다 아내의 생명이 더 중요할 것 같은데.........’

  수아르와 제프리 그리고 우리 부부, 네 사람은 제주 곶자왈과 비슷한 형태로 우거진 숲을 지나 울루와뚜 사원(Pura Uluwatu)에 도착하였다. 부겐베리아가 곳곳에 피어 있었다. 해변에 무더기로 피어있는 붉은 부겐베리아는 하늘, 나무, 바다의 다양한 푸른 색조와 어울려 더욱더 화사하게 다가왔다. 발리 어디를 가나 항상 만나는 석문(石門)인 찬디 븐타르(Candi Bentar)를 지나 절벽 위로 만들어진 길을 걸었다. 하나의 탑을 둘로 나누어 놓은 것 같은 석문 두 개는 선과 악을 상징한다. 그러나 그들은 선과 악을 모두 삶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어느 하나를 배척하지 않는다. 내용상으로는 우리의 음양(陰陽) 원리와 비슷한 것이다.

  따가운 햇살과 높은 습도 때문에 진땀을 흘리면서 회랑의 끝까지 걸은 뒤에 뒤를 돌아보았다. 하늘과 바다와 숲의 모든 기운이 절벽 끝에 아슬아슬하게 얹혀있는 둥근 지붕의 3층짜리 작고 소박한 메루(Meru, 성스러운 산을 상징하며 한국의 탑과 비슷한 형태임)에 집중되고 있었다. 까마득한 절벽 아래에서 시작하여 아득하게 펼쳐지는 넓은 바다, 하얀 거품을 물고 으르렁거리면서 절망적으로 달려들었다가 되밀려나가는 파도, 그리고 푸른 하늘이 절벽 끝의 작은 메루와 어울려 만드는 장엄한 풍광에 가슴이 울렁였다.

  지극한 아름다움은 성스러움으로 통한다. 사찰의 일주문(一柱門)이 성(聖)스러움과 속(俗)됨의 경계이듯, 울루와뚜 사원의 찬디 븐타르 역시 성과 속의 경계를 나누고 있었다. 찬디 븐타르를 통과하여 만난 울루와뜨 사원은 진정한 아름다움이 어떤 것인지 알겠느냐고 묻는 것 같았다. 울루와뚜 사원의 아름다움을 통하여 성스러움을 체감하지 못한다면 도대체 어디서 성스러움을 느낄 수 있느냐고 묻는 것 같았다.

  우붓으로 가기 전날 밤에는 많은 비가 내렸다. 천둥과 번개가 내리쳤다. 비가 오면 그네를 탈 수 없다는 말에 걱정이 되었다. 르네상스 울루와뚜 리조트에서 우붓까지 가는데 두 시간이 넘게 걸렸다. 이동 중에도 비가 쏟아졌다. 다행히 우리 일행이 도착했을 때는 비가 그쳤다. 그네를 타는 시간은 채 2분을 넘지 않았다. 젊은 직원들은 누구에게나 그네를 14번 밀어주었다. 왜 14번일까? 잘 모르겠다.

  그네 타기도 즐거웠지만 그네 타는 것을 구경하는 것은 더 재미있었다. 풍경과 조화를 이루는 각도로 만들어진 여러 개의 그네가 있었다. 세계 각지에서 온 흑인 백인 인도네시아인 아시아인이 그네를 탔다. 신혼부부가 많았다. 그네 아래에 펼쳐진 다랑논을 한 시간가량 걸었다. 신혼부부들은 다랑논 사이사이에 만들어 놓은 새집 모양의 둥지와 나무로 엮은 흔들 다리에서 멋진 인생사진을 찍으려고 몸부림을 쳤다. 보기에 아름다웠다. 우리 부부도 슬쩍 신혼부부 흉내를 내보았다. 아내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즐거워하였다. 우붓 원숭이 숲으로 가는 길에 수아르에게 물었다.

  “수아르도 아내와 함께 우붓 스윙을 해 보셨나요?”

  “아니요.”

  “아니, 남에게는 즐거움을 주면서 정작 자신의 아내를 소홀히 하다니! 별로 좋은 남편이 아니군요.”

  나의 농담 섞인 항의성 발언에 그는 선한 표정으로 그저 웃기만 했다. 우붓 스윙을 하는 곳과 자신의 집 사이가 불과 30여 분 거리밖에 안 되는데, 아내와 함께 그네를 타 본 적이 없단다. 서울에 살면서도 북한산이나 관악산을 한 번도 올라가 보지 않은 사람이 많은 것과 같았다. 사람 사는 모습은 어디나 비슷해 보였다.

  2000년대에 들어오면서 발리를 찾는 관광객이 해마다 증가하였다. 그 무렵 수아르는 한국말을 배워 관광 가이드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때 한국인을 대상으로 가이드 일을 하던 아내를 만났고, 연애를 하다가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 그에게는 세 자녀가 있다. 발리에서 대학에 다니는 큰딸, 중학교에 다니는 작은딸 그리고 초등학교 1학년인 아들이 있다.

  수아르의 아내는 학교 교육을 통해서, 또는 외국인을 상대하는 가이드 생활을 하면서 남녀평등이나 여성의 인권 문제를 듣고 배워서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아르의 아내가 반드시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전통 관습에 저항하지 않고,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며 아들을 낳은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하긴 얼마 전까지도 한국 여성들 역시 건강상 위험한 줄 알면서도 아들이면 출산하고 딸이면 낙태하는 일이 많지 않았던가? 수아르 아내는 관습에 저항할 생각을 해 보지 않았을까? 아니면 자발적으로 관습을 받아들였을까? 수아르의 아내에게 직접 물어보지 않아서 알 수 없었다.

  나는 딸 하나만 낳아 길렀다. 아내가 임신 중에 임신중독증에 걸려 그 하나의 딸마저도 잃을 뻔했었다. 우리 부부는 더 이상 아이를 낳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6대 종손인 나와 아내에게 반드시 아들을 낳아야 한다고 요구했었다. 우리 부부는 아버지의 요구를 거절하였다. 가부장적인 남성중심의 사회문화에 저항한 것이다.

  만약 우리 부부가 농사를 지으면서 아버지와 함께 살았어도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릴 수 있었을까? 아버지의 땅에 매달려야만 살 수 있는 상황이었다면, 우리의 자유의사를 지킬 수 있었을까? 아마 아버지의 뜻을 따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내는 목숨을 걸고 아들을 낳으려고 했을 것이다. 상상하기 싫었다.

  다행히 우리 부부는 땅에 얽매이지 않았다. 혈연이나 지연공동체의 강압에서도 벗어나 있었다. 도시에서 직장생활을 했었던 덕분에, 또 온전한 경제적 자립이 가능했기에, 자유롭게 우리의 뜻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의지가 컸다기보다는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가까운 친척 어른이 계신다. 그분의 첫째 며느리는 두 명의 딸을 낳았고, 둘째 며느리는 딸 하나를 낳았다. 그 어른은 세 손녀(孫女)만으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며느리들이 반드시 손자(孫子)를 낳게 해서 대(代)를 잇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며느리들에게 달콤한 제안을 하였다. 손자를 낳아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며느리들은 더 이상 아이를 낳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며느리들은 시아버지의 제안을 거절하여도 자신들의 생활에 아무런 지장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가부장적인 사고나 남존여비 사상은 이미 먼 옛날이야기가 되어버린 것이다.

  수아르의 큰딸 이야기가 나왔다.  

  “대학 다니는 큰딸의 전공은 무엇이죠?”

  “법학과에 다닙니다.”

  “공부를 잘해서 훌륭한 법률가가 된다면 가족의 영광이겠는데요.”

  수아르가 빙그레 웃었다. 그 큰 얼굴이 더 넓어졌다. 그의 표정으로 보아 큰딸은 그의 큰 기쁨이자 자존심인 것 같았다.

  “만약 큰딸이 다른 종교인과 교제를 하거나 결혼하려고 하면 어떡하시겠어요?”

  “막아야죠. 그래서는 안 되지요. 최근에 교제하는 남자친구가 같은 힌두교인이어서 다행이라 여깁니다.”

  인도네시아에 많이 사는 이슬람교도나 동티모르의 가톨릭교도와 사귄다면 단호하게 막을 것처럼 말하였다.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다른 종교인과의 결혼을 꺼리는 것과 비슷한 태도였다. 대개의 부모들은 자녀들이 자신과 똑같은 종교를 갖기를 원한다. 왜 그럴까? 종교로 인한 갈등이 생기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부모가 자녀들과 같은 의식과 문화를 공유하려는 태도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사회적 교류가 점점 더 활발해지고 있다. 서로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과 어울려야 하는 상황이 많아지고 있다. 이때 적용해야 하는 합리적인 소통 기준은 무엇일까? 서로의 차이를 존중하고, 공동규범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어느 특정 종교나 신념을 강요할 수 없는 시대인 것이다. 만약 특정 종교의 교리가 두 사람의 사랑을 방해하거나 막는다면, 그 교리는 폭력성을 띄게 된다. 인격의 성장과 삶의 성숙을 도모하는 종교의 본래 정신을 상실하는 것이다. 사람을 위해서 종교가 있는 것이지, 종교를 위해서 사람이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딸에게 나의 신념을 강요해서는 안 되었고, 강요할 수도 없었다. 딸은 자신의 신념을 따라 살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당연하다. 내가 해야 할 일은 그것을 존중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수아르는 자녀들의 종교나 삶이 자신의 뜻에 어긋나지 않기를 희망한다. 하지만 희망은 어디까지나 희망일 뿐이다. 아니, 희망에 그쳐야 한다. 그는 자녀들의 뜻을 꺾어서는 안 되고, 또 꺾을 수도 없을 것이다.

  “혹시 우리 부부가 수아르의 집을 방문할 수 있을까요?”

  “그럼요. 당연하죠.”

  그가 흔쾌하게 우리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고마웠다. 우리는 가게에서 자녀들이 먹을 과자와 과일을 샀다.  

  발리(Bali)는 적도(赤道) 아래에 있다. 그곳은 남위 8⁰ 부근이다. 11월은 우기(雨期)가 시작되는 달이자 해가 길어지는 시기다. 우리 부부가 그의 집을 방문한 시각은 오후 다섯 시 무렵이었다. 대문은 역시 찬디 븐타르였다. 대문부터 종교적이었다. 검은색의 찬디 븐타르가 집안의 성스러움을 지키는 것 같았다. 그의 집 안채는 북향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발리 사람들은 성지(城地)인 아궁산(Agung mountain)을 향하는 방향으로 집을 짓는다고 한다.

  아궁산은 발리의 중앙에서 조금 북동쪽에 있다. 수아르의 집은 발리의 남쪽에 있다. 그래서 안채의 방향이 북향이고, 가족사당의 위치 역시 안채의 북쪽이었다. 관광객에게는 아궁산이 단순한 관광지일 것이다. 그러나 발리인에게 아궁산은 성지이다. 예루살렘이나 메카 역시 관광객에게는 그저 관광지일 뿐이지만, 신앙인에게는 성지인 것과 마찬가지다.

  차가 좁은 골목을 지나 집 대문 근처에 이르렀을 때부터 몸집이 큰 검둥개가 긴 꼬리를 흔들면서 컹컹댔다. 골목에서 놀던 한 소년이 수아르를 보고 뛰어와 그의 팔에 매달렸다. 초등학교 1학년인 일곱 살 소년은 장차 수아르의 대(代)를 이을 아들이었다. 그의 부모님은 우리를 보자 힌두식의 합장 인사를 하였다. 우리도 그에 응하여 합장을 하고 허리를 숙여 절을 하였다. 노인들이 환한 미소로 반겨 주었다. 조금 늦게 들어온 아내와 작은딸도 우리를 미소로 환대해 주었다. 아내는 두 모녀와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모두 환하게 웃었다.

  그의 집은 크게 네 개의 공간으로 나뉘어 있다. 대문을 중심으로 우측에는 남에서 북으로 네 채의 작은 가옥이 차례대로 배열되어 있다. 모두 서향(西向)이다. 모친의 방과 재래식 부엌은 대문에 붙어 있다. 다음에는 고상(高床)식 목조 곡식창고(2층 구조임. 원두막 형태로, 습기와 벌레를 피하기 위한 구조)가 있다. 그다음에는 부친의 방과 농기구 창고가 순서대로 배치되어 있다. 농기구가 있는 창고 맞은편 넓은 마당에는 작물을 키울 수 있는 텃밭과 재래식 화장실, 돼지우리가 있다. 지금은 더 이상 돼지를 키우지 않는다고 했다. 집의 가장 북쪽 부분에 위치한 큰 마당은 온갖 농사일이 이루어지는 공간이다.

  대문의 좌측에는 북향(北向)의 안채가 있다. 거기에는 중학교에 다니는 딸의 방과 부부가 쓰는 방이 있다. 안채의 부부 침실 옆에는 입식 부엌과 수세식 화장실이 있다고 하였다. 일곱 살의 아들은 아직도 엄마 곁에서 잔다고 하였다. 가족들이 함께 음식을 해 먹고 대화를 나누는 주된 생활공간이었다.

  부부 침실 맞은편에는 화려하게 장식된 커다란 발레 다제(Bale Daje)라는 석조 건축물이 있다. 동향(東向)이어서 서향(西向)의 모친부엌과 마주하고 있다. 마치 한국 사찰의 관음전(觀音殿)처럼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다. 한국의 개인 집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제법 웅장하고 위엄이 있는 종교적인 건물이었다. 가보(家寶)를 보관하는 곳이라고 하였다. 거기에서는 결혼식과 제사는 물론이고 수시로 각종 의례를 행하였다. 수아르도, 그의 아버지도, 그의 할아버지도 바로 그 건물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할아버지의 장례식 역시 그 건물에서 하였다. 가족이 태어나면 발레 다제의 처마 밑에 태(胎)를 묻었다. 함께 사는 가족은 물론이고 시집을 간 딸들의 태도 묻었다. 발레 다제는 가족원들의 삶과 죽음의 원점(原點)이자 마음의 뿌리였다.

  발레 다제의 기단부로 오르기 위해서는 서너 개의 계단을 올라가야 했다. 그 건물 안으로 들어서기 위해서도 역시 몇 개의 계단을 올라야 했다. 자연히 위치가 조금 높았다. 남쪽의 안채나 동쪽의 사랑채를 내려다보는 형상이었다. 그 건물에 아침 햇살이 비치면 장엄한 분위기를 보여줄 것 같았다. 흥미롭게도 가장 잘 꾸며진 발레 다제를 사용하는 사람은 대학에 다니는 큰딸이었다. 큰딸이 시집을 간 뒤에는 장차 아들과 며느리가 살게 될 건물이라고 하였다.

  북향의 안채, 서향의 사랑채, 동향의 석조 건축물이 ㄷ자 형태로 놓여 있다. 그 ㄷ자 형태 가운데 작은 정자 모양의 대청이 있다. 이 공간 역시 각종 의례가 행해지는 곳인데, 외부 사람들이 왔을 때도 활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수아르의 집에서 가장 인상적인 공간은 남쪽의 생활가옥과 북쪽의 마당 사이에 위치한 가족 사원(Sangga)이었다. 가족 사원 안에는 하나의 큰 사당(祠堂)과 여러 개의 작은 보조 사당이 있다. 사당에는 수아르의 아내가 매일 코코넛 잎과 꽃잎으로 만든 화려한 제물 바구니인 차낭 사리(Canang Sari)가 놓여 있었다. 그의 아내가 매일 하는 일 중 가장 많은 시간과 정성을 쏟는 일은 신(神)들에게 바치는 차낭 사리를 만드는 일이라고 하였다.

  꽃과 음식이 담긴 차낭 사리는 착한 신의 제물로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악한 신을 달래기 위해 땅바닥에도 꽃과 음식이 담긴 차낭 사리를 놓아두었다. 석문인 찬디 분타르에 들어있는 정신과 똑같은 정신이 담긴 의례(儀禮)였다. 가족 사원은 큰 사원을 축소한 형태여서 힌두교의 전통신은 물론이고 스승 신, 돈의 신, 조상신 등을 모시는 곳이 각각 따로 세워져 있었다. 무척 화려하여 그들의 신앙심 크기를 엿볼 수 있었다. 수아르에 의하면 자기 가족사당은 다른 사람의 사당에 비해 작고 소박한 편이라고 하였다.

  수아르의 안내를 받고 설명을 들으면서 왜 그가 그렇게 사는지, 또 그의 아내가 왜 그렇게 사는지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수아르의 집은 단순한 생활공간이 아니었다. 그의 집은 신앙공간이었다. 성스러운 공간이었다. 생활에 신앙이 덧붙여진 것이 아니었다. 신앙에 생활이 덧붙여진 것이었다. 삶이 곧 신앙이고, 신앙이 곧 삶이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건기(乾期)에서 우기(雨期)까지, 태어나서 살고, 또 죽기까지, 삶의 전체 과정이 신앙 활동이었다. 먹고 자고, 수시로 신들에게 꽃과 향을 공양하고, 그봉안(gebongan)을 머리에 이고 행진하고, 가믈란(gamelan) 연주에 맞추어 신의 강림을 환영하고 감사하는 타리 펜뎃(tari pendet)춤을 추고, 아이를 낳아 기르고, 죽은 자를 장례 지내고, 작물을 심고 거두는 모든 생활 과정 전부가 신의 뜻을 찾고 기리는 신앙 활동이었다. 그들의 신을 위한 신앙 활동은 역설적으로 삶에 대한 강한 기쁨과 긍정의 표시처럼 보였다.

  수아르에게 신(神)이 없는 시간이나 공간은 없었다. 모든 곳에 모든 때에 신이 있었다. 그들은 세상의 모든 형태의 신앙을 다 포용하는 것 같았다. 인도 힌두 신앙의 기반 위에 애니미즘과 불교가 스며들어 있었다. 먼 훗날에는 알라나 여호와도 그들의 신으로 받아들일까? 그럴지도 모른다고 상상해 본다.

  우리의 고려시대나 중세의 유럽도 그러했을까? 지금도 사찰이나 교회에는 온갖 종교적 상징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일반 가정은 매우 세속적이다. 중세의 일반 가정은 어땠을까? 설마 일반 가정집까지 종교적이었을까? 발리 힌두인처럼 삶 전체가 종교적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수아르는 성직자가 아니다. 평범한 직장인이다. 그런데도 그의 집과 생활은 완벽하게 종교적인 것이다.  

  본디 신(神)은 보일듯하면서도 결코 보이지 않는 존재이다. 신은 신을 믿는 자의 마음과 생활에 영향을 준다. 보이지 않는 신이 있다는 확실한 증거는 믿음이다. 무엇이건 마음을 쏟으면, 그것이 만드는 세상에서 살게 된다. 바로 그 마음의 세상에서 살게 된다. 붓다의 가르침을 되새기면 붓다가 옆에 있다. 여호와를 믿으면 내면에서 들려오는 여호와의 말을 듣게 된다. 알라를 삶의 중심에 두면 알라의 세상이 펼쳐진다. 산신(山神)을 믿으면 모든 것에서 산신의 징표(徵標)를 보게 된다. 비슈누를 기다리면 비슈누가 나타나고, 시바를 숭배하면 시바가 나타난다.

  수아르는 모든 곳에서 신을 본다. 벼에 싹이 날 때는 브라만신이, 벼가 자라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을 때는 비슈누신이, 낫으로 벼를 베고 볏짚이 썩어갈 때는 시바신이 작용한다고 믿는다. 사람이 태어나고 살아가고 죽는 모든 때에도 신성(神性)이 작용한다고 생각한다. 어디 벼와 사람뿐이랴? 그는 세상의 모든 순간에 작용하는 신성을 느낀다. 그때그때마다 신을 환영하고 감사하고 두려워하며 겸허하게 산다. 만사를 과학적으로 해석하려는 나와 다른 세상을 산다.

  신을 향한 맹목(盲目)적인 신앙에서 벗어나, 신의 참된 얼굴을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자신이 키우는 나무의 크기와 모양을 바르게 알기 위해서는 다른 나무와 대비해 보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내가 믿지 않는 다른 신의 세상을 알아야, 비로소 내가 믿는 신의 참모습을 알 수 있다. 때로는 자신이 믿는 신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와야 한다.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도 노력해야 한다. 하나면 알면, 그 하나도 제대로 모르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신실한 신앙인인 수아르에게 신은 늘 곁에 있는 것 같았다.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 이야기를 종종 하는 것으로 보아, 그는 자신의 신앙에 확신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나만 알지 않고 다른 하나도 본 것 같았다. 신앙인들에게 신앙생활은 그 자체로 안식처이자 참된 고향이다. 수아르는 늘 신의 눈을 느끼며 사는 것 같았다.

  신앙생활을 멈춘다는 것은 신을 떠난다는 것이다. 신을 떠난다는 것은 고향을 떠나 나그네가 된다는 뜻이다. 나아가 그가 신앙공동체를 떠난다는 것은 사회적 죽음을 의미한다. 부모 가족 친구는 물론이고, 자신이 평생 살아온 삶에서 떨어져 나가는 일이다. 신과 함께 하는 축제와 신을 향한 찬양이 주는 기쁨을 버리는 일이다. 수아르는 지금 자신이 믿고 받아들이는 신을 떠나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그의 자녀들이 수아르가 믿는 신을 받아들일지, 아니면 다른 신을 믿거나 무신론자(無神論者)가 될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수아르는 스스로 자신의 길을 찾고, 부모가 믿었던 신을 자신의 신으로 받아들였다. 마찬가지로 자녀들도 스스로 자신의 길을 찾고, 어떤 신을 받아들일지 아니면 거부할 것인지를 선택할 것이다. 종교는 그것을 자율적으로 받아들인 사람에게는 의지처가 되지만, 강요받은 사람에게는 폭력이자 자유를 막는 장애가 된다.

  수아르의 집과 내가 사는 집을 대비해 보았다. 그가 사는 집은 조상 대대로 살아온 집이자, 거기에서 태어난 가족원 누구나 한 번은 살았던 집이다. 장차 그의 자녀와 후손들이 살 집이기도 하다. 가족들의 태를 묻은 곳이고, 각종 의례가 행해지는 곳이다. 반면에 내가 사는 집은 돈을 주고 산 집이다. 조상들과 함께 거처했던 곳이 아니다. 나의 딸은 이 집에서 살지 않을 것이다. 각종 의례는 공공장소에서 한다.

  수아르의 집이 ‘주인의 삶의 터전’이라면, 나의 집은 ‘나그네의 쉼터’이다. 수아르가 고향을 확보하고 있다면, 나는 세상을 정처 없이 떠돌고 있다. 수아르의 집이 신성한 종교적인 장소라면, 나의 집은 잠시 머무는 세속적인 장소이다.

  집은 그 집에 사는 사람의 의식과 행동방식에 영향을 준다. 수아르는 신들과 인간이 어울리는 성스럽고 풍요로운 세상에서 사는 것 같았다. 반면에 나는 지극히 합리적이고 세속적이며 계산적인 세상을 사는 것 같다. 그의 마음의 평안과 풍요가 부럽다. 문득 나는 허무하고 가난한 세상에서 사는 것처럼 느껴진다. 나는 어디에 터전을 잡고, 어떻게 마음의 고향을 만들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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