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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걍보리 Nov 30. 2023

숲길에서

16. 옷인가 피부인가?

  나는 한국말을 사용한다. 한국말로 생각하고, 한국말로 꿈을 꾼다.

  막 태어났을 때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말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다섯 살이 되었을 때는 한국말에 적합한 뇌와 입 구조를 갖게 되었다. 다른 말을 할 수 있는 기능과 구조는 퇴화했다. 억지로 배우지 않으면 다른 말은 할 수 없게 되었다.

  본디 한국말은 나와 무관(無關)하였다. 내가 한국말을 하게 된 것은 ‘우연(偶然)’이다. 어쩌다 그렇게 되었다. 부모와 주변인이 한국말을 쓰니까 나도 쓰며 살았다. 나는 한국말을 스스로 선택하지 않았다. 마치 부모를 선택하지 않은 것처럼. 내게 그냥 주어졌다. 부모가 옷을 입혀주듯이 주변 사람들은 한국말을 내게 쏟아부었다.

  처음 입어보는 옷도 익숙해지면 자신의 피부였던 것처럼 느껴진다. 옹알이(언어마다 옹알이도 다르다)에서 시작한 한국말은 마침내 나의 피부가 되었다. 한국말이 없으면 살 수 없게 되었다. 우연히 평생을 한국에서만 살았기 때문에 별 불편 없이 잘 살았다.

  한국에서 태어나 성장했지만, 사연이 있어 청소년기에 태국으로 가서 태국말만 하면서 산 할머니가 있었다. 그녀는 한국말을 완전히 잊어버렸다. 자신 외에는 주변에 한국말을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한국말이 아닌 태국말이 그녀의 모국어가 되었다. 그녀에게 한국말은 갈아입을 수 있는 옷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바뀔 수 없는 피부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많은 인간관계가 우연히 내게 주어졌다. 부모는 여러 가지 얼굴을 한 친척들과 함께 내 세상으로 왔다. 나는 아들 역할 외에도 조카와 손자의 역할을 하면서 자랐다. 활동 영역이 넓어지면서 인간관계도 많아졌다. 학교에서는 학생이었고 직장에서는 사원이었다. 이런 인간관계는 옷인가 피부인가?

  스티브 잡스는 이슬람교도였던 친부(親父)와 가톨릭교도였던 친모(親母)를 모르고 자랐다. 친부와 친모는 주변사람들의 반대로 결혼할 수 없었다. 그는 태어난 지 2주 만에 양부모인 잡스 부부에게 입양되었다. 양부모는 스티브 잡스가 입양되었다는 사실을 그가 어렸을 때부터 숨기지 않았다. 훗날 받게 될 정신적 충격을 막기 위해서였다. 어린 스티브 잡스가 학교에 부적응하면 이사를 하였다. 양부모는 그의 건강한 성장을 위해 헌신하였다.

  훗날 스티브 잡스는 스탠포드 대학교 초청 강연에서 자신의 입양 사실을 고백하였다. 우연히 친부가 TV를 보았다. 우여곡절 끝에 서로 연락할 기회가 생겼다. 친부는 스티브와 만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스티브는 친부와 친모를 거부하였다. 그들을 단순한 정자와 난자 은행 취급하였다. 스티브 잡스에게 친부모와의 혈연관계는 옷인가 피부인가?

  모태신앙(母胎信仰)이라는 말이 있다. 과장된 말이다. 태아(胎芽)에게 무슨 신앙이 있단 말인가? 부모가 그렇게 믿고, 자녀에게 그렇게 생각하라고 주입한 것이다. 설령 모태신앙이 아니었다고 할지라도 오로지 하나의 종교만을 접촉하고, 그 하나만을 알면서 산 사람들이 있다. 그들에게 자신이 믿는 신은 모국어와 같다. 물고기가 물을 떠날 수 없는 것처럼 자신이 따르는 종교가 만들어준 세계를 벗어나기 힘들다. 이때 그의 종교는 옷인가 피부인가?

  모국어와 혈연관계, 종교뿐만 아니다. 남자와 여자에 대한 고정관념, 특정 지역에 대한 차별의식, 피부색과 나라에 대한 편견, 다양한 문화에 대한 몰이해를 자신의 불변의 신념으로 삼는 사람들이 있다. 도덕적 우월성을 방패 삼아 타인에게 자신의 신념을 강요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에게 그 신념은 옷인가 피부인가?

  옷은 갈아입을 수 있다. 자신에게 어울리는 것을 선택할 수 있다. 옷은 나의 자유를 방해하지 않는다. 반면에 피부는 임의로 선택하거나 바꿀 수 없다. 피부는 나의 자유를 구속한다.

  모든 사람은 근원적으로 능동적이다. 어떤 강요와 억압 속에서도 능동적이다. 사람은 누구나 그때그때마다 선택할 자유를 가지고 있다. 총칼 앞에 무릎을 꿇을 때는 죽음 대신에 굴복을 선택한 것이다. 사람은 모국어, 혈연관계, 종교, 정치적 신념, 세상에 대한 이런저런 견해나 신념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동시에 능동적으로 수용한다.

  사람은 언제나 능수동시(能受同時)의 세상을 산다. 지금 내 앞에 전개되는 세상은 ‘나에게 주어진 동시에 내가 받아들인’ 세상이다. 내가 지닌 모든 관념이 본래 피부가 아닌 옷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때, 나는 좀 더 자유롭다. 그 관념들이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내가 선택한 옷임을 자각하는 그만큼, 그 옷이 내게 잘 어울리는지 살필 수 있다. 더 사랑할 수 있다.

  만약 자신을 흡족하게 하는 어떤 신념이나 사상 또는 문화가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사람이 옷을 입지 않고 살 수 없는 것처럼 아무런 생각 없이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신이 소속된 공동체의 문화가 불편하다고 해서 공동체를 떠나기는 쉽지 않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최소한 자신이 어떤 신념과 문화를 가지고 살고 있는가를 알아야 한다. 지금 입고 있는 옷이 어떤 옷인지는 알고 살아야 한다. 알아차리면 선택할 수 있고, 그만큼 자유롭다.

  내게는 상처가 있다. 오래도록 맘속으로 아꼈던 사람 중에 단지 내가 그와 다른 옷을 입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소중했던 관계를 끊어버린 사람들이 있었다. 반드시 같은 옷을 입어야만 할까? 사람에 따라 좋아하는 옷이 다를 수 있지 않을까? 옷의 모양과 색깔은 다르지만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동행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기다린다. 그들이 다시 내 세상을 찾아와 주기를. 나는 소망한다. 그들이 입고 있는 것은 옷이며 피부가 아니란 사실을 깨닫기를. 그들이 좀 더 자유로워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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