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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걍보리 Jan 31. 2024

숲길에서

17. 복 많이 받으세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해가 바뀔 무렵이면 주변 사람들과 나누는 흔한 말이다. 어린 시절에는 어른들이 하는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복(福)’이라는 글자는 ‘수(壽)’라는 글자와 함께 밥그릇이나 숟가락에 많이 새겨져 있었다. 방석 이불 베개 등에도 수놓아져 있었다.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 복이라는 글자에는 좋은 뜻이 들어 있는 것 같았다. 대복 오복 승복 복순 등 주변 사람들 이름에도 많이 들어간 글자였다. 하지만 그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하였다.

   조금 자란 뒤에는 ‘복’이라는 말을 ‘노력 없이 주어지는 행운’ 같은 것이라고 이해하였다.  ‘기여의 정도에 비례해서 적절한 보상이 주어져야 정의롭다.’고 생각하던 청소년기에는 노력 없이도 주어지는 ‘복’이라는 것을 정당하게 보지도 않았고 바람직하게 여기지도 않았다. 그런 생각 때문이었을까? 어른들이 내게 건네는 ‘복 많이 받아라.’는 말을 그다지 고맙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시큰둥하게 여겼다. 심지어 뭔가 좋은 것을 주는 것 대신에 값싸게 호의를 전하는 빈말일 것이라고 가볍게 넘겼다. 

   “밥 먹읍시다.”라든지 “술 한 잔 드세요.”라는 말은 구체적이다. 그 말의 효력을 몸으로 느낄 수 있어 실답다. 반면에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말은 ‘밥 많이 먹으세요.’라는 말에 비해 공허하다. 구체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없다. 게다가 얼마나 쉽고 가벼운가? 상대방에게 ‘나는 너에게 좋은 것을 주고 싶어.’라는 마음을 슬쩍 비춰주는 척 생색을 내면서, 큰 수고 없이 그저 입만 한 번 열면 된다. 진정성 없이 함부로 남발해도 아무 탈이 없는 정말 편리한 말이라고 생각하였다. 차라리 ‘열심히 노력해라. 그러면 좋은 열매를 얻을 거다.’라는 말이 더 진솔하고 설득력이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생각이 조금씩 변했다. 내 뜻대로 되는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을 눈치채기 시작했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삶의 요소들 대부분은 노력으로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쩌다 내게 주어진 남자 몸을 어떻게 바꾸겠는가? 대개의 경우 변신(變身)은 불가능하다. 내가 사는 동안 XY 성염색체를 바꿀 길은 없다. 외모와 재능을 가꾸고 다듬는 데도 한계가 있다. 부모도 국가도 내 뜻과 무관하게 그냥 주어진 조건일 뿐이다. 내가 고른 것이 아니다. 입고 먹고 마시는 것도 자율적으로 선택하는 것 같지만, 큰 틀에서 보면 시장이 제공하는 것 중에서 내 주머니 사정에 따라 제한적으로 선택하는 것이다.

   걱정의 대부분은 쓸데없다고 한다. 걱정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는 뜻이다. 걱정하는 대신에 주어진 현실을 기꺼이 수용하면서 대응책을 찾는 것이 실제로 더 바람직하고 효과적이다. 대개 일상은 크고 작은 과제의 발생과 해결의 반복이다. 산다는 것은 끝없이 발생하는 문제를 그때그때마다 해결해 가는 과정인데, 해답 역시 완벽한 것일 수 없다. 만족과 불만 사이에 있는 어떤 것일 뿐이다. 선의의 노력이 비극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있으며, 공든 탑이 미처 헤아리기 어려운 변수 때문에 무너지기도 한다. 유한한 존재인 사람이 어떻게 무한한 변수를 통제할 수 있겠는가? 불가능하다. 이런 실상을 표현하는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는 말은 비인과적(非因果的)인 우연(偶然) 요소를 운명(運命)으로 받아들이라는 뜻을 품고 있다.

   자녀를 길러본 사람은 알 것이다. 키우는 것이 아니라 자라는 것을 도울 뿐이라는 것을. 장미로 자라는 아이를 민들레로 키울 수 없다. 민들레로 자라는 아이를 장미로 키우려 하면 탈이 난다. 자기 욕심대로 조종하려는 교만한 태도를 내려놓아야 한다. 그저 물을 주고 돌보면서 장미는 장미답게 민들레는 민들레답게 크게 해야 한다. 겸허한 마음으로 단지 잘 자라기를 바라야 한다. 부모는 아이에게 생명을 선물해 주었지만, 그의 삶은 온전히 그의 몫이다. 그를 지배하려 하면 그의 정신을 죽이는 것이다. 그저 힘이 닿는 대로 하는 데까지 해 주고, 잘 자라기를 기도하면 된다. 그 기도하는 마음은 자녀에게 불운이 닥치기 않기를, 행운이 따르기를, ‘많은 복을 받기를’ 소망하는 마음이다.

   부모와 자녀 관계만 그런 것이 아니다. 교사는 학생이 스스로 자라는 걸 보조하고, 의사는 환자의 자기 치유력을 응원하며, 농부는 작물의 자생력을 지원한다. 실연(失戀)으로 슬픔의 늪에 빠진 친구에게, 사고를 당해 영구적 장애를 갖게 된 이웃에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의 곁에 서서 그의 고통에 공감하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것은 그다지 많지 않다. 그가 더 깊은 고통에 빠지지 않기를, 어떤 행운이 그를 다시 일으켜 세워주기를, 많은 복을 받기를 진심으로 기원하는 것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다.

   ‘복 많이 받아라.’는 말이 어렸을 때는 빈말로 들렸으나, 어른이 된 지금은 간절한 기도의 말로 들린다. 깊은 진실을 담고 있는 말처럼 느껴진다. 서양의 'Happy New Year'처럼 경박스럽지도 않다.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말은 자녀들에게만 해주는 말이 아니다.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진심을 담아 해 줄 수 있는 말이다.

   나이 든 지금 나는 자식이나 조카들에게 ‘복 많이 받으라.’고 말하면서 진실로 행운을 기원해 준다. 어쩌면 그들은 그 말을 가볍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내가 어린 시절처럼 ‘복 많이 받으라.’는 말을 시큰둥하게 여겼던 것처럼. 그래도 그런 기원 외에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을 딱히 찾기 어렵다. 설령 내가 그들을 도와준들 무엇을 얼마나 도울 수 있겠는가? 마찬가지로 이 글을 읽으시는 당신에게, 우연히 내 세상을 찾아주신 당신에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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