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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걍보리 Mar 06. 2024

숲길에서

22.  알아차리면 된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 자기보다 먼저 승진한 친구는 만나기 싫다. 보상금으로 벼락부자가 된 지인이 부럽다. 시기심이 생긴다. 마음만 불편해지는 것이 아니다. 시기나 질투가 심하면 실제로 몸이 아프기도 한다.

  전통적으로 시기나 질투는 나쁜 감정이어서 버리거나 숨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때로는 죄악으로 여겼다. 유교문화권에서는 시기를 칠거지악(七去之惡) 중 하나로 여겼다. 착한 사람은 마땅히 그런 감정을 느끼면 안 되는 것이었다. 훌륭한 사람이 되려면 수련을 하고 도(道)를 닦아 그런 부도덕한 감정을 초월해야 했다.

  시기 질투는 왜 생기는 것일까? 그런 감정을 없앨 수 있을까? 시기 질투는 부도덕한 것일까?

  생존과 번식이라는 키워드로 동물의 행동을 설명하는 진화심리학적 관점에서 보면 시기 질투는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상대적 우위(優位)는 안전을, 비교 열위(劣位)는 불안전이나 위험을 뜻한다. 주변인이 자신보다 더 우월한 위치에 서면, 자기는 저절로 열등한 자리에 서게 된다. 낮아지면 생존에 필요한 자원 확보가 어려워진다. 칭찬을 못 받는 아이는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진다. 존경받지 못한 어른은 외면당한다. 위기감을 느끼면 본능적으로 이런저런 대응을 하게 된다. 시기심은 자신의 열등성을 극복하고 생존 가능성을 높이려는 대응방식의 하나다. 

  시기 질투 감정은 비교할 때 생긴다. 비교하지 않고 살 수 있는가? 비교 없이 살 수 없다. 생존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중심으로 공간적 사회적 좌표를 만들어야 한다. 사슴은 늑대와 거리를 유지하면서 풀을 뜯어먹는다. 먹기도 해야 하고 도망도 갈 수 있어야 살 수 있다. 사슴은 자신의 상대적인 위치를 잘 알아야 살 수 있다. 비둘기는 매의 사정권을 가늠해야 목숨을 지킬 수 있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위상(位相)을 파악하지 못하면 부적응하게 된다. 늘 비교하면서 자신이 어느 자리에 서야 적절한지 판단해야 한다. 나아갈 때와 물러설 때를 변별해야 한다. 누구나 다 그러하다. 문제는 부적절하거나 지나친 비교의 늪에 빠질 때 생긴다.

  사랑받는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에 비해 더 안전하고 더 행복하다. 자신보다 더 사랑받는 형제를 질투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종종 자식들은 부모의 사랑을 더 많이 얻기 위해 싸운다. 불공정(不公正)하면 부모에게도 분노한다. 사람만 그러는 것이 아니다. 원숭이도 공정(公正) 욕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분노한다. 시기하고 질투한다.

  원숭이는 오이보다 바나나를 더 좋아한다. 실험 상황에서, A 원숭이와 B 원숭이 모두에게 오이를 주면 불평 없이 잘 먹는다. 그런데 A 원숭이에게는 바나나를 주고, B 원숭이에게는 오이를 주면 상황이 달라진다. A 원숭이는 불평 없이 바나나를 잘 먹지만, B 원숭이는 오이를 거부하고 화를 낸다. 불공정한 상황이 지속되면 먹고 있던 오이마저 내던져 버린다. 질투심에 불타는 것이다. 질투는 원숭이나 사람 모두에게 타고난 감정이다. 

  노력하면 타고난 감정을 없앨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시기 질투는 부도덕한 것일까? 아니다. 재채기에 도덕성이 없는 것처럼 감정에도 도덕성이 없다. 잘못된 감정은 없다. 사람도 생물이기에 시기 질투 감정을 초월할 수 없다. 시기 질투를 느끼는 것 자체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부도덕한 것도 아니다. 시기 질투를 느끼는 것 자체를 도덕률이나 율법으로 억압하는 것은 도리어 자연스러운 생명 현상을 거스르는 반(反) 생명적 태도다.

  시기 질투가 자연스러운 생명 현상이라고 해서 방치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시기 질투라는 심리적 에너지를 자기 발전의 동력으로 만들면 자신이나 주변인에게 바람직할 것이다. 개인심리학자인 아들러(Alfred Adler)는 열등감을 자기 성장의 동력으로 보았다. 열등함을 극복하기 위해서 노력한다는 것이다. 일반화하기는 어렵지만 경청할만한 견해이다. 시기 질투는 열등성에 대한 인식에서 생긴다. 시기 질투 역시 성장의 에너지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시기 질투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승화하지 못하면 어떤 일이 생길까? 인간관계를 파괴할 수 있다. 형제간에 차별받는다고 생각하면, 자신보다 더 사랑받는 형제를 다양한 방법으로 괴롭히려 할 것이다. 자신의 처지를 슬퍼하고 우울해하며 내면의 평정(平靜)을 잃을 것이다.

  시기 질투의 반대편에는 거만과 교만이 있다. 거만과 교만도 그 자체로 부도덕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겸허한 마음으로 거만과 교만을 순화시키지 못하면 원만한 인간관계를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다. 품격도 상실할 것이다. 

  현실을 살펴보자. 힘의 우열에 따라 출발점은 불평등하고 과정은 불공정하다. 법과 원칙은 강자에게는 너그럽고 약자에게는 가혹하다. 크고 작은 비교 속에서 시기 질투를 피할 수 없다. 재화 지식 재능 지위 외모 어느 면이 되었건 간에 소유 수준의 차이에 따른 엄연한 차별도 일상의 일부다. 대개 적게 가진 자는 더 많이 가진 자를 부러워한다. 반대로 많이 가진 자는 더 적게 가진 자를 무시하거나 교만하게 군다.

  시기 질투 거만 교만은 맥락에 따라 저절로 생기는 감정들이어서 피할 수 없다. 그것들이 그 자체로 부도덕한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런 부정적인 감정이 인간관계를 훼손하고, 그런 감정을 느끼는 사람을 괴롭힌다는 데 있다. 그러면 그런 부정적인 감정들을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가?

  모든 감정은 상황에 대한 해석과 연관되어 있다. 부정적인 감정을 잘 다스리기 위해서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어떤 식으로 이해하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 자신의 감정상태뿐만 아니라, 어떤 이유에서 그런 감정을 느끼는지 알아차려야 한다. 누구를 무엇 때문에 시기하는지, 무얼 가지고 교만을 떠는지 알아야 한다.

  부정적인 감정은 비교에서 온다. 비교대상은 역사적 사회문화적 개인사적 배경을 갖는다. 무엇을 가치 있는 것으로 보는가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 또 개인의 경험에 따라 다르다. 감정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이 무엇을 대상 삼아 시기 질투를 느끼고 교만을 떠는가를 알아차려야 한다. 그 비교대상이 돈 지위 외모 재능 등 양적 요소에 있는지, 신념 지혜 사랑 심미안 취향 등 질적 요소에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비교대상과 달리 대개 비교기준은 자기 자신이다. 자기보다 우월한 자를 시기하고, 자기보다 열등한 자를 무시한다. 알랭 드 보통(Alain de Botton)은 비교열등을 불안의 원천으로 보았다. 완전한 사람은 없기에 아무도 불안을 피할 수 없다. 비교를 통해 자신의 열등성을 확인하는 것은 고통스럽다. 어떻게 해야 이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는 사람을 볼 때 그 사람의 고유성을 보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남이건 자신이건 ‘있는 그대로’를 존중하는 태도를 길러야 한다. 남을 있는 그대로 보면 그를 한 존엄한 인간으로 인정할 수 있고,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면 ‘이대로 괜찮다’는 자긍심을 가질 수 있다. 모든 사람은 비교를 통해 평가하기 이전에 ‘그냥 있는’ 존재이다. 키가 큰 사람도 있고 작은 사람도 있다. 뚱뚱한 사람도 있고 마른 사람도 있다. 어떤 맥락에 놓이기 이전의 ‘그 자체’는 높거나 낮지 않다. 선하거나 악하지 않다. 다만 그렇게 존재할 뿐이다. 그냥 그렇게 있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자신이 부정적인 감정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알아차리면 선택할 수 있다. 그 감정에 매달려 있을 것인지, 아니면 버릴 것인지. 감정은 자기가 아니다. 구름이 생겼다가 사라지는 것처럼 오고 가는 것이다. 때가 되면 시간이 가져가 버린다. 단단하고 영원할 것 같은 감정도 시간 속에서 무(無)가 되어버린다.

  알아차리면 내려놓을 수 있다. 그 감정이 고통스러운 것임을, 고통 자체임을 알아차리면 더 쉽게 내려놓을 수 있다. 그냥 알아차리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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