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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걍보리 Sep 12. 2024

숲길에서

28. 아무도 모르지

  광주에 가면 내가 하는 주요 행사는 주로 실내에서만 지내시는 86세의 장모님을 모시고 드라이브를 하는 일이다. 

  장모님은 차를 타고 여행하는 것을 무척 좋아하신다. 나 역시 고향에 가면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힌다. 나와 장모님은 의기투합하여 장거리 여행으로 피곤해하는 아내를 반강제로 이끌고 집을 나섰다. 

  당일 목표는 영광 칠산 바다. 아침 열 시. 식사를 마치고 칠산 바다를 구경할 수 있는 백수 해안도로를 향했다. 

  “오매, 벌써 벼들이 익고 있네. 가을이네 가을이여.”

  황룡강을 끼고 펼쳐진 누런 들을 지나면서 장모님이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가슴이 투우욱 터지는 것 같네. 바다에 가면 더 그러겠지?”

  바다를 정말로 보고 싶으셨던 것이다. 우리들 마음은 벌써 바다에 가 있었다. 해안에 도착도 하기 전에 바다가 주는 개방감을 미리 느꼈다. 밀물이면 더 좋으리라.    

  1시간쯤 달렸을까. 묘량을 지나 영광읍에 가까이 갔다. 20분만 더 가면 바다다. 갑자기 장모님이 배가 고프다고 하였다.

  “어째 배가 고프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우리 밥 먹고 가세.”

  나는 곧바로 미리 찾아 놓았던 몇 개의 식당 중 가장 가까이 있는 식당으로 차를 몰았다. 배가 고프면 멋진 풍광도 감흥을 일으키지 못하는 법. 원래는 바다를 구경한 뒤에 점심을 먹을 생각이었다. 식사 후 구경을 하는 것으로 급히 계획을 바꾸었다. 반찬은 걸었고 밥은 맛있었다.

  식사를 마친 뒤에 나와 장모님이 먼저 차를 탔다. 에어컨을 빵빵하게 켜고 바다로 출발할 준비를 마쳤다. 하지만 아내는 아직 식당 입구에 서 있었다. 식당 사장과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잠시 뒤 아내의 손짓에 따라 오른쪽 차 창문을 열었다. 아내가 고개를 들이밀며 말했다.

  “식당 사장님께 모시송편을 맛있게 만드는 집을 소개해 달라고 했는데, 바로 이 앞이라고 하시네. 사장님이 같이 가 주시겠대.”

  얼굴이 갸름하고 몸매가 호리호리한 식당 여주인이 앞장서고 아내가 그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이 20여 미터쯤 떨어진 떡 가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차를 그 가게 앞에 세웠다. 나와 장모님도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통통한 근육질의 젊은 남사장이 맛보기 떡을 주었다. 깨송편이었다.

  “어, 맛있네. 우리 추석 때 이거 나눠먹자.”

  아내가 떡을 먹으면서 만족스러워했다. 곧바로 추석날 가족들이 함께 나눠먹을 수 있는 적은 분량의 떡을 샀다.

  “영광에 오면 꼭 사 먹고 싶었던 떡이야.”

  즉흥적인 것을 싫어하고 계획적인 것을 중시하는 아내다운 말이었다. 아내는 오래전부터 기회가 오면 떡을 살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갑자기 장모님이 떡 가게 주인을 불렀다.

  “쫀득쫀득한 것이 아주 맛이 좋네요. 실버센터 사람들 간식으로 좋을 것 같소. 사장님, 120개 싸 주세요.”

  즉흥적인 결정이었다. 주인이 떡 개수를 일일이 세어가면서 큰 아이스박스를 채워나갔다. 장모님은 떡만 산 것이 아니었다. 일정을 아예 바꿔버렸다.

  “이 떡을 가지고 지금 실버센터로 가세. 지금 몇 신가?”

  “오후 한 신데요.”

  “센터 간식 시각이 두 시 반이니, 지금 출발하면 그 시각 안에 도착하지 않을까?”

  센터로 급히 서둘러 가야 한다는 어투였다.

  “아니, 바다는 어쩌고요?”

  “바다? 바다는 다음에 보세. 빨리 센터로 떡을 가져가세.”

  “오늘은 예정대로 바다에 가고, 내일은 센터로 떡을 가져가고. 그러면 어떨까요? 그게 좋을 것 같은데.”

  나의 은근한 설득이 아무 소용이 없었다.

  “아녀, 이 쫀득한 맛이 없어지면 안 돼. 지금 바로 가야 해.”

  장모님은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실버센터로 가야 한다고 했다. 장모님의 마음은 이미 바다가 아닌 떡과 실버센터로 가 있었다. 장모님은 언제나 옳은 법. 바다로 향하던 차를 돌려 시내의 실버센터로 내달렸다. 간신히 두 시 반에 떡을 전할 수 있었다. 장모님은 센터에 함께 다니는 노인들과 직원들에게 떡을 나누어 주었다. 의기양양했다. 어린이처럼.

  나는 하릴없이 장모님이 하시는 모양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가고 싶다던 바다의 '바'자도 꺼내지 않았다. 문득 이런 말이 떠올랐다.

  ‘아무도 모르지. 계획대로 살 것처럼 생각하지만,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어떻게 알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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