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분리(分離)
“너는 동성애를 인정할 수 있어?”
“아니. 그건 짐승들이나 하는 거야.”
“만약 네 주변의 누군가가 동성애자라면 함께 밥을 먹을 수 있어?”
“아니. 그러기 싫어. 아예 말을 안 붙이고 싶어.”
“그래? 음. 사실 나 동성애자야.”
“정말?”
“너는 속고만 살았냐? 수십 년 동안 함께 밥 먹고 술 마신 우리 사이지만 짐작도 못했을 거야. 어쨌든 나를 상대도 하기 싫다니 섭섭하다.”
“야, 정말이야? 말도 안 돼.”
“하하하. 너는 동성애자를 혐오하는구나? 교리 탓이야?”
“음. 그냥 도덕적으로 안 된다는 거지 혐오까지야.”
“만약 예수가 다시 와서 동성애자를 만난다면, ‘더러운 놈아, 물러가라.’라고 할까 아니면 ‘형제여, 함께 밥을 먹읍시다.’라고 할까? 네 생각에 예수님의 뜻은 어디에 있을 것 같아?”
상오와 나는 고등학교 동창이다. 모임에 가서 그를 만나면 고교 시절로 돌아간다. 검은색 교복을 입은 까까머리 고등학생들이 좁은 교실에서 와글대던, 친구를 찾아 복도를 뛰어다니던 그 시절로. 맥주잔을 부딪쳐 가며 수다를 떤다. 7년 전에는 여러 친구들과 어울려 남해 바다로 회갑기념 수학여행도 갔었다. 둘 다 커피는 카페라테를, 술은 맥주를 좋아한다. 반면에 그는 교회에 다니고 나는 가끔 절에 간다. 그는 트럼프를 좋아하지만 나는 트럼프를 싫어한다.
요즘 사회집단 사이의 갈등이 심하다. 특정 문제를 두고 양 집단의 입장이 날카롭게 대립한다. 시민사이의 대립이 정치인 사이의 대립으로 연장되고, 정치인 사이의 대립이 시민사이의 대립으로 비화한다. 대화가 잘 안 된다. 우리 편이 아니면 박멸해야 할 적으로 여긴다. 수치심을 잃은 탐욕스러운 정치가들은 침소봉대(針小棒大), 지록위마(指鹿爲馬), 양두구육(羊頭狗肉), 아전인수(我田引水) 행위를 대놓고 한다.
법비(法匪)들은 법을 악용하여 사적인 이익을 취하는 데 거리낌이 없다. 법비들은 법과 원칙을 내세우면서 법과 원칙을 파괴한다. 정의롭지 못했던 전두환이 정의사회구현을 주장한 것처럼.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는 언론은 자기 이익에 부합한 집단의 큰 잘못은 덮고 반대편의 털끝만 한 허물은 산처럼 부풀린 왜곡된 정보를 뿌려댄다. 공정과 상식이라는 가면을 쓰고 불공정하고 비상식적인 기사를 남발한다. 타락한 권력의 스피커 노릇을 하는 타락한 언론은 우리 사회의 악(惡) 중의 악이다. 그런 탐욕스러운 정치가와 법비와 타락한 언론을 시민사회가 용인하는 한 갈등은 계속될 것이다.
왜 시민들은 감시자가 되지 못하고 법비와 타락한 언론에 휘둘리는 것일까?
하나는 물질만능주의에 젖어있는 시민들이 ‘모두를 부자로 만들어주겠다.’는 교활한 정치가의 가당치 않은 주장에 끌려 다니기 때문이다. 어떻게 모든 사람이 다 부자가 될 수 있겠는가? 사기 사건에서는 사기를 친 사람의 책임 못지않게 사기를 당한 사람의 책임도 묻는다. 정치영역에서는 거짓선동에 끌려 다닌 시민들의 책임도 가볍지 않다. 거짓을 거짓으로 알지 못해 어리석은 선택을 한 경우, 어마어마한 사회적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24년 12월의 비상계엄과 혼란에 대한 궁극적인 책임은 어리석은 선택을 한 시민 자신들에게 있다.
다른 하나는 사람들이 흑백논리(黑白論理)를 못 벗어나기 때문이다. 나는 언제나 옳고 너는 언제나 그르다는 양자택일(兩者擇一)은 깊은 생각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아군(我軍) 아니면 적군(敵軍) 여부만 판단하면 곧바로 행동에 돌입할 수 있다. 실제로 우리 편은 모두 옳고 상대편은 모두 나쁜 것일까? 절대로 그럴 수 없다. 그런데도 흑백논리를 좋아하는 이유는 게으른 뇌가 모든 것을 단순화해서 경제적으로 생각하려는 경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시민들이 편견에 빠지는 이유는 공들여 상상하지 않고 깊게 생각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무작위로 선발된 남녀노소 100명이 모인 집단이 있다고 생각하고 상상실험을 해 보자. 사람들을 여러 기준으로 나눠볼 수 있다. 남녀, 노소(老少), 쌍꺼풀, 피부색, 몸무게, 짜장면과 짬뽕, 등산과 낚시, 영화, 좋아하는 색 등 수많은 기준으로 양분할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어떤 기준이 되었건 간에 자기가 소속된 집단은 상대집단보다 더 선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지하철에서도 자기 칸에 탄 사람들이 옆 칸에 탄 사람들보다 더 선할 것이라고 믿는다고 한다.
10가지 20가지의 기준을 차례로 제시하고, 제시된 기준에 따라 모임을 계속 바꾸게 하면 무슨 일이 생길까? 궁극적으로 자기 집단이 상대집단보다 더 선하다는 편견은 허물어진다. 기준이 바뀔 때마다 자기 집단원이 상대집단원이 되고, 상대집단원이 자기 집단원이 되는 것을 체험하기 때문이다.
동성애라는 기준만을 가지고 사람을 평가한다면 상오와 나는 함께 밥 먹고 술 먹는 사이가 될 수 없다. 트럼프라는 기준만을 강조한다면 우리의 우정은 깨질 것이다. 그러나 상오와 내가 우정을 지속할 수 있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동성애나 트럼프는 수많은 기준 중에 하나일 뿐이라는 자각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훨씬 더 많은 공통점이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상오와 나 사이만 그러한가? 아니다. 모든 사람들 사이가 그러하다. 우선 모든 사람은 사람이다. 그 사실만으로도 공존(共存)의 가능성을 확보할 수 있다. 우리는 같은 말을 쓰고 비슷한 옷을 입고 쌀밥에 김치를 먹는다. 공통점은 많고 차이점은 미미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은 차이를 부풀려서 갈등을 증폭시키는 까닭은 무엇일까? 차이점만 보기 때문이다. 공통점을 잘 못 보기 때문이다. 때로는 갈등을 통해 어떤 이익을 취하려 하기 때문이다.
상오와 내가 우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상오’와 ‘트럼프’ ‘나’와 ‘동성애’라는 특성을 분리(分離)해서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상오 = 트럼프’가 아니다. ‘상오 ≠ 트럼프’다. 상오의 트럼프 지지는 상오가 가진 생각의 하나일 뿐이다. ‘나 = 동성애’가 아니다. ‘나 ≠ 동성애’다. ‘동성애’는 ‘나’가 가진 무수한 특징 중 하나일 뿐이다. 상오가 트럼프를 버릴 수 있듯이 나도 동성애를 버릴 수 있다. 상오와 나 사이에 존재하는 커다란 공통기반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 사회의 갈등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사람을 존중하고, 흑백논리에 빠지지 않고, 거짓선동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을 휘두르는 내면의 탐욕을 알아채고, 갈등을 부추기는 자들을 변별해 내고, 공익을 위해 헌신하고 생산적인 정책을 제시하는 지도자를 가려내려는 노력을 해야 하지 않을까?
참, 나는 동성애자가 아니다. 동성애자를 가슴으로는 받아들이지 못하지만 머리로는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그들은 나와 함께 이 세상을 살아가는 같은 사람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