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희망은 힘이 세다
손자가 곧 돌을 맞는다. 아이를 보고 있으면 온갖 생각과 느낌이 든다.
아이는 무엇이든 손에 잡히면 입으로 가져간다. 나도 저 시기에는 그랬을 것이다. 아이가 장난감 자동차를 태워달라고 보챈다. 나도 어른들에게 이렇게 저렇게 해달라고 보챘을 것이다. 밥을 입 가까이 댈 때 입을 벌리고 손으로 숟가락을 잡으려고 하면 좋아한다는 뜻이고, 고개를 좌우로 내돌리면 싫어한다는 뜻이라고 짐작한다. 장난감이 제 맘에 들면 환하게 웃으면서 다가서고, 싫으면 온몸으로 내밀면서 거부한다. 나도 그랬을 것이다.
아이가 칭얼대면 기저귀를 새것으로 갈아준다. 불쾌한 표정에서 경쾌한 표정으로 바뀐다. 목욕을 시켜주면 한결 가뿐한 모습으로 방안을 기어 다닌다. 지저분한 걸 싫어하고 청결한 걸 좋아하는 것은 어른과 다를 바 없다. 호기심을 가지고 보고 듣고 만지고 조작하려 한다. 제 키를 넘는 높이에서는 뒤로 물러서고, 손을 내밀어 만질 수 있는 높이에서는 과감하게 내려온다. 언어 수리 능력을 학습하지 않았어도 타고난 몸의 논리를 가지고 기어오르고 넘어서고 내려선다. 장 피아제(Jean Piget)는 이 시기를 감각동작기라고 지칭했다.
아이가 노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몸’은 중력을 비롯한 물리법칙과 인과론, 진화의 산물인 생물학적 정보가 종합된 실체라는 생각이 든다. 아이는 자신도 모르는 어떤 힘에 의해서 사람의 몸을 받고 태어났다. 사람세상을 산다. 아이는 자랄 것이고 때가 되면 ‘자신이 누구인지’ 물을 것이다. 스스로 존재 이유와 의미를 찾을 것이다.
아이가 할 일은 무럭무럭 자라는 것이다. 아이는 하루하루 몸동작과 손놀림을 정교하게 다듬어간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은 무엇이고 싫어하는 것은 무엇인지를 어른들에게 어떻게 알려야 하는지 배워간다. 아이는 여린 새싹이다. 여리기에 자랄 수 있다.
아이의 오늘은 어제보다 낫다. 내일은 오늘보다 더 나을 것이다. 자라나는 새싹에겐 희망이 가득하다. 희망을 온몸에 갖추고 태어난다. 동시에 미처 다 자라기도 전에 쉽사리 꺾일 위험이 늘 존재한다. 희망과 불안은 아이의 핵심 정서다. 희망차게 자라는 아이를 보면서 생(生)의 기쁨을 보고, 위험을 빠질 수 있는 아이를 보면서 생의 불안을 본다. 여린 새싹을 보면, 어린아이를 보면 저절로 연민의 감정이 생긴다. 장래를 염려하게 된다. 잘 자라기를 기도하게 된다.
돌이 된 손자를 보고 있으면 희망도 크고 염려도 크다. 머지않아 칠십 세가 되는 나는 희망도 작고 염려도 작다. 살만큼 살았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2024년에 태어난 아이는 2100년까지 살 확률이 높다. 2100년대는 어떤 세상일까? 상상이 잘 안 된다. 지금 세상이 돌아가는 꼴을 보면 그리 낙관적이지만은 않다. 그러나 아이의 맑은 표정과 성장에의 갈망을 보면서, 아이가 더 좋은 세상에서 살기를 소망하는 엄마의 정성을 보면서, 세상은 지금보다 더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품는다. 아이와 엄마가 있는 한 세상은 쉽사리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자연과 세상의 끊임없는 폭력 속에서도 세상이 아름답게 빛나는 까닭은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이렇게 살고 있는 까닭은 불안과 좌절과 폭력을 희망이 이겨냈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살아있는 한 희망은 있다. 희망은 힘이 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