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초록인간
사고체계에는 크게 두 가지 유형이 있다. 직관적 체계(사고체계1)는 자극이 오면 자동적으로 빠르게 즉각 반응하는 체계이다. 진화의 결과이며 정서가 담겨 있다. 계산은 어림으로 한다. 특별한 노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논리적 체계(사고체계2)는 자극에 대해 규칙을 따라 느리게 반응하는 체계이다. 후천적으로 학습을 통해 익힌 체계이며 망각하기도 쉬워서 지속적인 노력을 필요로 한다. 일상에서는 대체로 큰 노력이 필요 없는 직관적 체계를 많이 사용한다. 반면에 편파성을 줄이는 동시에 중립적이고 논리수학적인 판단을 해야 할 때는 많은 시간을 소비하는 논리적 체계를 동원한다.
어느 날 갑자기 초록색 피부를 가진 사람을 만난다면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지금까지 본 적이 없었던 사람이기에 깜짝 놀랄 것이다. 즉시 도망치거나 공격하여 제압하려고 할 것이다. 빠른 판단을 요구하는 상황에서 시간이 많이 걸리는 논리적 체계를 사용한다면 위험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 오랜 세월에 걸쳐 이질적인 형상을 한 사람을 보면 위험하게 느끼고 도망치거나 공격하는 것은 생존에 더 유리했을 것이다. 직관적 체계는 일상에서 실용성이 높다. 그러나 엄밀성이 떨어지고 편견에 따른 판단을 할 가능성이 높다.
만약 다급한 상황에서 사고체계1에만 의존하여 초록인간을 살해했다면, 늦게야 초록인간이 뛰어난 공감능력을 가진 지성적인 인간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면 어떻게 될까? 서로 대화를 나누며 공존(共存)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지 않을까?
도망이나 공격은 쉽다. 하지만 대화는 어렵다. 대화를 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입장을 고려해야 한다. 내 견해나 가치관을 수정할 수도 있어야 한다. 때로는 대화 과정에서 상대방의 숨겨진 동기도 파악해야 한다. 직관적인 판단에 비해 대화는 힘들다.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여 경청해야 하는 대화는 사고체계2에 해당하며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한다. 피곤하다. 귀찮을 수도 있다.
그러나 초록인간도 인간이다. 벌레나 뱀이 아니다. 우리가 초록인간에게 놀란 것처럼, 초록인간도 갈색인간인 우리를 보면 놀라지 않을까? 초록인간이 갈색인간인 우리를 공격 대상이 아닌 대화의 상대로 대해주기를 원하는 것처럼, 초록인간도 갈색인간인 우리가 그들을 대화의 상대로 여겨주기를 원하지 않을까? 서로 살기 위해서.
인도네시아 뉴기니 밀림에는 수많은 부족사회가 존재했다. 그들은 자기가 소속된 부족의 영역을 벗어날 생각을 하지 않고 살았다. 영역을 벗어나는 것은 죽음을 의미했다. 부족사이에 싸움도 잦았다. 현대에 들어와서 유럽인을 처음 만난 원주민은 공포에 질린 표정을 보이며 뒤로 물러섰다. 사고체계1이 작동한 것이다. 그러나 몇 세대가 지나지 않아 그들 대부분은 오늘날 다른 나라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자동차를 타고 휴대폰을 사용하며 산다. 사고체계2가 작동한 덕분이다. 문명인과 야만인으로 만났었지만 다양한 형식의 접촉과 의사소통으로 차이를 넘어선 것이다.
차이를 극복하고 편견을 이겨내는 데 필요한 핵심 요인은 무엇일까? 연대와 협동정신이다. 유럽인과 원주민은 무엇이 되었건 간에 연대하고 협동해야 해결할 수 있는 공동과제나 목표가 있었기에 서로 이해하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함께 일하고 자주 접촉하면서 서로 비슷해졌을 것이다.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 결과는 흥미롭다. 아이들은 약자를 괴롭히는 사람보다 약자를 돕는 사람을 더 좋아했다. 설령 자신이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공정한 분배를 더 선호했다. 사회자원을 독점하려는 사람을 견제하고, 폭력적인 사람을 경계했다. 연구자들은 그런 사회적 성향을 긴 진화의 산물이라고 해석하였다. 경쟁과 갈등보다는 협동과 상호존중이 생존가능성과 생산성을 높였기 때문이다.
뉴스를 보면 세상은 각박해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는 일상생활 대부분이 타인의 선의에 의존하고 있다.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우리는 타인으로부터 공격받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산다. 각종 사건 사고를 자세히 보자.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도 있지만,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은 훨씬 더 많다.
인간의 본성을 두고 성선설과 성악설을 대등하게 소개하지만, 굳이 따지자면 사람의 마음은 선한 마음이 악한 마음에 비해 훨씬 더 높은 비율을 차지한다. 그런데 성악설을 성선설과 비슷한 비중으로 다루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익과 손실에 따르는 감정이 다르기 때문이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만 원을 얻는 것에는 둔감하지만, 천 원을 잃는 것에는 예민하다. 많은 양의 빵보다 한 개의 위험한 칼이 생존여부에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내가 갈색인간이라면 나 이외의 타인은 초록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 반대로 다른 사람에게는 내가 초록인간으로 보일 수 있다. 타인을 대하는 데 있어서, 단기적으로는 사고체계1에 의존하는 것이 편리할 것이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잘 살기 위해서는 사고체계2를 훈련할 필요가 있다. 상대의 말을 경청하고 공존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것이 나와 초록인간이 함께 행복하게 사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