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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길에서

37. 파도는 늘 있다

by 걍보리

파도는 늘 있다. 파도는 살아 있다. 펼쳐진 모래사장은 밀려드는 파도를 거부하지 않는다. 넓은 가슴으로 파도를 껴안는다. 거듭거듭 밀려오는 파도를 오냐오냐 받아들인다. 파도는 재잘대고 모래는 미소 짓는다.

사람들은 모든 일이 자신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소망한다. 그런데 이런 소망은 실현될 수 있을까? 어림없는 소리다. 인간을 창조했다는 전지전능한 신(神)마저도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인간들 때문에 속을 끓이고 분노하였다.

뜻대로 안 되는 일은 많고 많다. 뜻대로 되는 일은 적고 적다. 심지어 자기 자신도 뜻대로 되지 않는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세상의 모든 문제와 과제의 출발점은 자기 자신이다. 내가 존재하기에 문제도 있고 과제도 생겼다. 내가 없으면 나와 관련된 문제도 없고 과제도 없다. 사람이 해결하고 싶어 하는 과제 중의 과제는 바로 자기 자신이다. 사람은 늘 자신의 존재 자체를 과제로 삼고 염려하는 존재다.

우리는 종종 영원히 변치 않는 실체적 자아가 있다고 착각한다. 어떤 사람은 실체적 자아를 찾기 위해 몸부림친다. 사이비 사상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나 시간적 존재인 인간에게 고정된 자아는 있을 수 없다. 사람은 태어나서 자라고 성숙하고 노쇠해 간다. 세월을 따라 자아도 변해 간다. 이런 자아의 실상(實相)을 무아(無我, 고정된 실체가 없고 변하는 자아)라고도 하고, 가아(假我, 임시 자아)라고도 한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각 연령대별로 해야 할 일도 달라진다. 영아기 유아기 초중등시기 청년기 중년기 노년기별로 과업이 다르다. 사람들은 각 시기에 따라 자신에게 주어진 과제를 해결해 가면서 산다.

아이는 성장하면서 인간관계를 확대해 간다. 돌이 지나면 어린이집을 간다. 처음 보는 또래 아이도 자신을 돌보는 선생님도 낯설기만 하다. 낯가림은 파도처럼 아이의 마음을 뒤흔든다. 어린아이에게 부모 품을 벗어나는 일은 죽을 것같이 두려운 일이다. 어린이집 앞에서 부모와 헤어지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며 엉엉 우는 아이를 보면 마음이 아프다. ‘사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을’ 실감한다. 그 순간 아이의 마음에는 거칠고 어두운 파도가 휘몰아친다. 아이는 그 파도를 견뎌야 한다.

초중고 시절은 몸과 마음이 빠르게 자라는 시기다. 세상 경험이 부족하여 위험에 쉽게 노출된다. 학교는 늘 비교하고 평가하는 곳이다. 고평가에는 자아가 부풀고, 저평가에는 자아가 위축된다. 학교는 바깥세상의 축소판이다. 학교는 천국이 아니다. 학교 안에서 아이들은 크고 작은 상처에 시달린다. 자신의 가능성과 한계를 이해하기도 하고 이해하지 못하기도 한다. 자신이 꿈꾸는 자유를 찾아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사회규범에서 일탈(逸脫)하기도 한다. 그때마다 기존질서는 학생을 억압하고 징벌한다.

학교는 종종 밝은 온실이 아닌 어두운 감옥이 된다. 통제의 파도는 쇠사슬처럼 학생을 묶는다. 저항하면 바닥에 쓰러뜨린다. 고통스럽다. 반항해 보지만 대개 일시적이다. 때가 되면 통제의 파도를 자신의 질서로 받아들인다. 타협하면서 특정 사회문화의 한 사람이 되어 간다. 무의식적으로. 무의식적이기에 자신이 한 문화에 구속되고 길들여진 존재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 어른이 되면 대개 문화의 주인이 아닌 관습의 노예로 산다.

고통 속에서도 청소년을 다시 일으키는 힘은 심신의 성장력이다. 성장에의 희망은 억센 바람과 거친 파도를 이겨내게 한다. 청소년은 질풍노도를 체험하면서 마음근력을 키워간다. 자신감은 절정에 이른다. 졸업을 하면 배움터라는 좁은 울타리를 벗어난다.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간다. 세상은 놀이터이자 싸움터다. 같은 크기의 파도여도 힘이 센 사람에게는 재미있는 파도요, 힘이 약한 사람에게는 위험한 파도다. 세상은 온갖 파도가 일렁대는 바다다.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싶은, 파도를 희롱하며 살고 싶은 사람들은 더 큰 힘을 열망한다.

성인이 되어 활동 영역이 넓어질수록, 인간관계가 복잡해질수록 해결해야 할 과제도 많아진다. 문제도 다양해진다. 세월을 따라 몸도 마음도 변해간다. 중년기와 노년기를 거치면서 종종 걸어온 길을 되돌아본다. 스스로 놀란다. 얼마나 많은 파도를 헤치면서 살아왔는가?

나이가 들면 더 이상 파도와 싸우거나 이기려 하지 않는다. 한 파도가 지나가고 나면 새로운 파도가 온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파도와 싸우는 것보다는 견디거나 받아들이는 것이 더 편하다는 것을 눈치챘기 때문이다. 파도가 없는 바다는 평안한 바다가 아니라 죽은 바다라는 것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문득 산다는 것은 파도를 타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그래. 파도는 늘 있지. 이 파도가 지나면 어떤 파도가 나타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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