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책상아래 축구화.
서른 중반을 넘어선 나이에도 너는 아직도 축구장에서 축구선수로 뛰고 있다. 유니폼이 땀에 젖어 뛰고 있는 너의 모습에 가끔은 나를 겹쳐 그려보기도 한다. 이제, 나는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는 것보단 책상에 앉아 글을 쓰기 위해, 몸부림치는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책상 아래를 내려다보면 나는 축구화를 벗지 못한 채 글을 쓴다. 실패한 축구 선수로 남겨진 과거가 참 싫었다. 그 과거를 끊어내려 악착같이 축구화를 벗으려 애썼으나, 엉켜버린 축구화의 끈은 결국 풀 수 없을 만큼 조여졌다. 그리고 그 실패의 과거도 삶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일 나이가 되었을 때. 나는 축구화를 신고 타자기를 두들기기로 했다.
2. 오디세이아와 로베르토 바조
너의 첫 기억 속 축구선수는 누구였을까? 나는 94년 미국 월드컵의 화려한 꽁지머리 로베르토 바조였다. 아무래도 해피엔딩보단 새드엔딩으로 기억에 남아서 그런가? 너도, 나도, 발전된 미디어의 혜택으로 호날두와 메시의 화려한 플레이를 언제든 볼 수 있다. 하지만 90년대 초반 우리가 첫 축구를 시작했던 시기에는 해외축구를 접하기 힘들었다. 그나마 월드컵을 통해서 화려한 선수들을 볼 수 있었다. 94년 대한민국은 극적인 월드컵 진출로 기억에 남은 미국 월드컵이었다. 그때 이탈리아의 화려한 꽁지머리 로베르토 바조라는 선수에 한껏 두근거렸던 기억이 난다. 당시에 뛰어난 선수들은 많았다.
너는 네덜란드의 베르캄프를 좋아했고, 친구들은 브라질의 화려한 선수들을 좋아했다. 당시 바조는 이탈리아를 결승으로 이끈 영웅이었다. 적어도 결승전에서 11미터 승부차기 차기 전까진 말이다. 영웅의 시련이라고 하기에는 참 비극적 엔딩이었다. 바조의 실축으로 결국 우승은 브라질이 차지했다. 늘 고개를 들고, 화려한 골을 넣고, 꽁지머리를 휘날리며, 포호 하던 바조가 고갤 숙인 채. 울먹이던 모습은 잊히질 않는다. 너도, 나도, 선수생활을 하며, 그 부담감을 이해하게 되었다.
초등학교 2학년부터 고등학교 3학년에 부상으로 그만두기까지 10년을 선수로 뛰었다. 집에서 생활보단 합숙생활이 많았고, 선배와 선생님의 구타는 그 당시 일상이었다. 너와 걸핏하면 합숙소를 도망치고 무작정 바다로 가자고 했던 기억이 난다. 운동을 그만두고 어떠한 준비도 없이 스무 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는 왜 하필 그때 돌아가셨을까? 두근거리는 스무 살의 기억은 나에게 없었다. 우울했고 슬펐고 겁났으며 두려웠다. 처음으로 어른의 부재를 느꼈다. 누군가 그 우울을 걷어주고 길을 제시해주길 바랬다.
작가가 되고 싶다는 나에게 너는 비웃음보단 책 한 권을 선물했던 기억이 난다. 하필이면 왜 <오디세이아> 였냐고 물었을 때. 집에서 냄비 받침으로 쓰다가 그냥 나에게 선물로 준 거라고 했다. 나는 <오디세이아>를 상당히 재미있게 읽었다. 만약 너의 집 라면 받침의 책이 <짜라투스라는 이렇게 말했다> 같은 지금도 읽기 버거운 철학 책이었다면 나는 지금 작가를 하려던 마음을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작가가 되기로 마음먹고, 공부를 했을 때. 기본 서사는 고대 연극의 구성이 기본이다. 영웅은 모험을 떠나고 시련을 겪고 그곳에서 조력자를 만나고 또는 사랑에 빠졌다가 누군가를 잃고 좌절하고 결국은 이겨내는 것! 영웅의 서사에 따르면 94년 로베르토 바조는 실패한 영웅이었다. 이탈리아를 결승에 올렸으나 단 한 번의 실축으로 비극의 주인공으로 남았으니 말이다. 한동안 나는 로베르토 바조라는 축구선수를 그렇게 기억했다. 그리고 로베르토 바조가 은퇴하던 때. 바조는 인터뷰에서 말했다.
"나는 축구와 20년이 넘도록 사랑을 했다. 축구를 할 수만 있다면 수명이 줄어들어도 좋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어쩌면 나는 축구를 더욱 잘하기 위해 도핑(doping)을 사용했는지도 모른다. 내가 사용한 유일한 도핑은 바로 끊임없는 노력이었다."
만약 94년 월드컵 승부차기의 실축 후, 로베르트 바조가 은퇴했다면 그는 영원히 실패한 영웅으로 기억됐을 것이다. 하지만 이후 바조는 계속 축구화를 신었고 부상과 감독들과 불화를 이겨내며 선수로써 화려하게 은퇴했다. 그에게 있어 94년 월드컵은 어느 영웅이 겪었던 고난의 한 부분이었다. 오래전 낡은 문학잡지에서 읽은 어떤 작가의 글이 떠오른다.
"당신의 인생 페이지는 당신이 읽은 수많은 책들보다 두터울 것입니다. 그러니 마지막 페이지를 써내리기전까지, 나아감을 멈추지 마세요."
지금의 너는 여전히 축구선수로 뛰고 있다. 지금의 나는 글을 쓰는 작가가 되었다. 우리 삶이 해피엔딩일지 새드엔딩일지 모르나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우린 이제 축구경기의 전반전 정도를 지나고 있다. 경기를 끝내는 휘슬은 울리지 않았다. 앞으로 연장전도 있을 수 있고, 승부차기도 있을 수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