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드 번역할 때 말장난 살리기

by BestPart

부부가 우편물을 정리하던 중, 남편이 5센트 동전(nickel)이 든 자선 단체 우편물을 발견한다. 한껏 개구진 표정으로 우편물을 집어서 흔들며 남편은 말한다.

"If I had a nickel for every time a charity sent me a nickel"


모 유명 시트콤에 나온 Dad Joke(아재 개그)다. If I had a nickel for every time~ 이라는 유명한 관용구를 인용한 말장난인데, 평생 이런 농담이나 듣고 살아야 되냐며 무표정으로 좌절하는 아내의 모습이 백미.


사실 드라마 번역할 때 가장 난감한 파트는 전문 용어가 주르륵 나오는 장면이 아니라 이런 말장난들이다. 전문 용어야 하나씩 검색해서 옮기면 그만이지만, 말장난은 말장난이라는 의도 자체를 살려야 하기 때문에 원문을 그대로 옮기기에는 한계가 있고, 많은 경우 해석이 아니라 창작이 들어가야 한다.


위 대사의 경우엔 '자선 단체에서 5센트를 보낼 때마다 5센트가 생긴다면'으로 직역해도 괜찮겠지만, 상황에 맞게 좀 더 눈살 찌푸려지는 아재 개그로 가고 싶다면 원문과는 아예 다르게 '내 보물 9호는 구호 단체 동전이야'정도로 하는 것도 나쁘진 않다. 이 대사는 '왜 저래? 개노잼' 소리가 절로 나오게 번역을 해야 성공인 대사니까. 아무튼 이런 대사를 발견할 땐 스스로에게 자유도를 훨씬 많이 주는 편이다. 말장난이라는 의도만 제대로 반영한다면 원문을 철저하게 무시해도 상관없다는 주의인지라.


관용구를 활용한 말장난 대사는 이런 것도 있다. 모 메디컬 드라마에서 음모를 꾸미는 두 사람이 이런 대화를 한다.


A: We're not kicking the can down the road, here.

B: Now, score a goal with that can. Bye.


kick the can down the road는 (이유는 당최 모르겠지만) '할 일을 내일로 미루다'정도의 뜻을 가진 관용구다. 그러므로 A의 대사는 원래라면 무난하게 '우리는 시간을 질질 끌지 않아' 정도로 번역하면 되지만, B의 대사 때문에 일이 좀 꼬인다. 관용구에 포함된 단어 중 can을 가져다 썼고, '골을 넣다'라는 비유적 표현을 한 번 더 써 버린 덕에 번역하기 까다로워졌다. can이라는 단어를 아예 무시하고 번역을 한다고 쳐도...


A: 우린 원래 시간을 질질 끌지 않아

B: 그러면 얼른 골이나 넣어 봐요


보시다시피 대화 흐름이 매끄럽지가 않고 생뚱맞다. B의 대사는 솔직히 어떻게 바꿔 볼 여지가 없으니 저렇게 둔다고 치면, 이번엔 A의 대사를 B에 맞춰 재창조할 필요가 있다. '골을 넣는다'고 했으니 축구라고 쳐 보자. 축구에서 시간을 질질 끌고, 공격이 지지부진할 때? 가장 무난하게 쓰는 표현은 '공을 돌린다'다. 그러므로 위 대사는 최종적으로 다음과 같이 번역할 수 있다


A: 우린 공 돌리면서 시간 끌지 않아

B: 그러면 얼른 골이나 넣어 봐요


그리고 이제 마지막 예시. 조금 천박하긴 하지만 말장난 예시로 쓰기엔 이만한 게 없다.

모 시트콤의 남자 캐릭터 A는 짝사랑녀 Sophie가 다른 남자와 소개팅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화가 난 A는 같이 그 장면을 지켜본 친구 B와 이런 대화를 주고받는다.


A: Sophie has a new man in her life. I'm so mad I cannot see straight.

(소피에게 새 남자가 생겼어. 화가 나서 앞이 안 보일 지경이야)


B: Well, I'm looking right at him, and I don't see straight either.


A의 대사는 어렵지 않지만, 문제는 B다. straight은 '똑바로'라는 뜻 외에 '이성애자'라는 뜻이 있다. 즉, B는 A가 뱉은 straight라는 단어를 이용해 Sophie의 소개팅남이 게이 같다는 농담을(실제로 게이였다) 던지고 있는 것.


직역으로는 도저히 살릴 수가 없는 문장이기 때문에, 상황만 제대로 파악한 뒤 아예 재창조를 해야 하는 부분이다. 여기서 B의 대사를 번역할 때 명심해야 할 점은 다음 두 가지.


-A가 뱉은 대사 중 적당한 단어를 골라 가져와서 말장난을 만들어야 한다.

-'Sophie의 소개팅남이 게이 같다'라는 의도가 정확히 반영돼야 한다.


A의 대사에서 그나마 다양하게 써먹을 수 있는 단어는 '화나다' 정도. 그러면 '저 사람이 게이 같다'라는 말은 어떻게 살려야 할까. A도 남자고 소개팅남도 남자니까, '소개팅남이 오히려 널 보고 더 흥분할 것 같다' 정도로 하면 그나마 의도를 살릴 수 있다. 그래서 최종 납품본은 다음과 같이 나왔다.


A: Sophie has a new man in her life. I'm so mad I cannot see straight.

(소피에게 새 남자가 생겼어. 화가 나서 앞이 안 보일 지경이야)

B: Well, I'm looking right at him, and I don't see straight either.

(저 남자 물건도 너 보고 화낼 거 같은데?)


요새 AI다 뭐다 해서 번역가들 다 큰일 났다고 하는데, 아직 이런 말장난까진 못 살리는 거 같아서 그나마 조금 안심하는 중. 여기까지 정복당하면 정말 그땐 AI님들의 번역 검수만 하면서 살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조금만 천천히 발전해 주라. 내가 아직 번역으로 하고 싶은 게 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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