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너만의 세계에 있는 것 같아.”
커피를 마시던 중 친구가 멍 때리고 있는 내 모습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나는 왠지 정체가 탄로 날 위기에 놓인 스파이처럼 황당하다는 제스처와
어서 이 화제에서 자연스럽게 벗어나야겠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왜 부끄러워했던 걸까. 이상한 일을 한 것도, 아무도 몰래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아마도 애써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상대방이 그런 생각이 들게끔 만들어버렸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싶었나 보다.
나는 몇 년 전 몽상가라는 선고를 받았다. 온갖 다양한 성격유형검사에서
발도 못 뺄 정도로 한결 같이 이런 결과만 나왔다.
특별한 주제 없이 그저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모든 상상들이 망상에 불과했다니! 처음엔 부정했다.
하지만 모든 것엔 단점만 있는 건 아니니 한 번 몽상가로 살아보면서 괜찮은 점을 찾겠다고
나름의 사명감을 쥐고 이 길을 걸어보기로 했다.
아무리 뜬 구름으로 가득한 생각을 하며 산다 해도 내 육체는 현실에 머문다.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공상에만 갇혀있다면 그저 땅에 묶여있는 헬륨 풍선 인간에 불과하지 않나.
그래서 생각에 지배당하지 않고 오로지 현재 내가 놓인 상황에 집중하기 위해,
자발적 고립상태에 빠지지 않기 위해 집 밖을 나오기 전 모든 생각들을 방 안에 방치시켜 두고 나온다.
그래서 내 방엔 중력이 없다. 사물은 모두 가라앉아 있지만 나의 투명한 색감의 상상들은 방 안을 휘젓고 다닌다.
이 방에 있으면 평화롭고 안정감 또한 느낀다.
나를 보듬어주고 위로해준다. 이 온기들은 나에게 바라는 것 없이 조용히 안아줄 뿐이다.
그리고 무엇이든 될 수 있고 할 수 있다는 무한한 가능성이 주어지는 듯하다.
침대에 누워 그윽하게 천장과 마주 보며
떠다니는 몽상들을 한 모금 씩 삼키고 있는 나를 알아차릴 때면,
어릴 적 나만의 아지트를 만들어 장난감들과 놀면서 부모님이 퇴근하고 돌아오시기만을 기다리던
그 순수한 아이가 아직 내면 한편에서 그대로 숨 쉬고 있음을 느낀다.
이 중력 없는 방엔 어린 날의 꿈과 동심, 영화 같은 낭만 등 산뜻한 감성도 있고
미래에 대한 불안, 사랑하는 이들과의 이별에 대한 두려움 같은 버거운 감정도 있다.
어른이 되면서 이 모든 것들은 점차 내 마음을 더 어둑하고 묵직하게 만들었다.
통제하려 하지 않으면 현실을 겉도는 방랑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감정과 몽상에 지지 않으려 투쟁한 끝에 얻어낸 방이다.
앞으로도 내게 짐이 될 만한 모든 고민과 상상들은 가뿐하게 이 방에 투척할 것이다.
가끔씩 내 머릿속으로 몰래 승차해 친구에게 걸리기도 하겠지만..
언젠간 지금보다 더 성숙해진다면 영원히 열어보지 않을 깊은 서랍 속에 잠재울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