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였을까. “요즘 어떻게 지내?”라는 질문에 “너무 바빠”라는 답이 자동으로 튀어나오기 시작한 게. 바쁜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정말 그게 전부였을까? 하루하루를 숨 가쁘게 살아내면서도, 내 일상이 그저 바쁘다는 말로 축약되는 게 맞는 걸까 하는 의문이 어느 순간부터 내 안에 자리 잡았다.
친구와의 퇴근길, 늘 그렇듯 서로 바쁘다는 하소연으로 대화가 시작됐다.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모르겠어.” “나도 정신없이 바빠.” 그때 문득, 내가 입 밖으로 내뱉은 질문이 우리의 대화를 멈추게 했다. “근데... 우리, 진짜 그렇게 바쁜 걸까?” 친구는 놀란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 역시 놀랐다.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이었지만, 그 물음은 내 마음 깊숙이 숨어 있던 불편함을 건드린 것이었다.
바쁘다는 말의 무게
친구는 잠시 침묵하다가 조심스럽게 답했다. “바쁘다고 하지 않으면, 내가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다는 게 들킬까 봐 무서워. 괜히 뒤처지는 것 같고, 아무 의미 없는 시간을 보내는 사람처럼 보일까 봐.”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다르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바쁘다고 말하는 건 단순한 상태 설명이 아니라, ‘나는 의미 있는 무언가를 하고 있어’라는 방어막 같았다. 우리는 정말 바쁘다기보다는 바쁘지 않다는 사실이 불안했던 건 아닐까.
하지만 내가 깨달은 건 바쁜 시간이 곧 의미 있는 시간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매일 스케줄에 쫓기며 시간을 꽉 채우고 살아가도, 하루가 끝나면 허탈함이 남는 날이 많았다. 그때 친구에게 말했다. “진짜 의미 있는 건 바쁜 시간이 아니라, 충실한 시간이더라.” 그 말을 하면서 나 자신에게도 되새겼다. 하루를 가득 채우는 것보다 중요한 건 그 시간이 내게 어떤 의미를 주는가였다.
바쁘지 않은 하루를 살아보기로 하다
그날 이후 우리는 작은 실험을 시작했다. ‘바쁘다’는 말을 하지 않기. 단순해 보였지만, 의외로 쉽지 않았다. “요즘 바쁘지?”라는 질문은 마치 인사처럼 어디서나 들려왔다. 그때마다 “네, 바빠요”라고 대답하던 습관을 깨야 했다. 대신 다른 말로 답을 했다. “요즘 이런저런 일들 하고 있어요. 나름 재미있어요.” 처음엔 어색했다. 하지만 그 대답은 의외로 대화를 더 풍성하게 만들었다. 상대방도 바쁘다는 말로 맞받아치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친구와 나는 하루의 끝에 서로에게 전화를 걸어 ‘오늘 하루 바쁘다는 말을 안 한 순간’을 공유했다. 친구는 웃으며 말했다. “같이 일하는 사람이 ‘너 요즘 바빠 보이지 않아, 괜찮아?’라고 하더라.” 우리는 한참 웃었다. 바쁘지 않아 보인다는 말이 오히려 칭찬처럼 들렸다. 그리고 그 말에 담긴 여유가 조금은 자랑스럽기도 했다.
바쁨의 방패를 내려놓자 보이는 것들
며칠이 지나자 마음에 작은 변화들이 찾아왔다. 바쁘다는 말을 하지 않으니, 자연스럽게 마음에도 틈이 생겼다. 그 틈을 통해 보지 못했던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출근길 지하철 창밖으로 스쳐 가는 풍경, 퇴근길 노을, 점심시간에 마시는 커피의 향. 늘 바빠서 놓쳤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는데, 내가 보지 않았던 거였다.
한 번은 친구와 공원에서 산책을 하며 이런 얘기를 나눴다. “예전 같으면 이 시간에도 ‘아, 바빠 죽겠어’ 하면서 걸었을 텐데.” 친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지금은 그냥 걷는 이 시간이 좋아.” 우리는 그날 한참을 걸으며 ‘바쁘지 않은’ 시간을 만끽했다. 마음이 바쁨에서 벗어나니, 시간도 조금은 느리게 흐르는 것 같았다.
바쁘다는 말 없이도 충분한 대화
‘바쁘다’는 말이 빠지자 대화는 더욱 깊어졌다. “오늘 하루 어땠어?”라는 질문에 “바빴어”라는 답 대신, 진짜 하루를 설명하게 됐다. “오늘 아침에는 커피를 마시면서 창밖을 봤어. 바람이 꽤 시원하더라.” “점심때는 새로운 식당에 갔는데, 생각보다 괜찮더라고.” 이런 이야기들이 쌓이자 대화는 풍성한 색을 입었다. 바쁘다는 말 한마디로 끝낼 수 있었던 대화가, 작은 이야기들로 이어지며 서로의 하루를 더 잘 이해하게 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바쁘다’는 말은 때론 우리의 진짜 이야기를 가로막는 장벽이었다는 것을. 바쁘다는 방패를 내려놓자, 우리는 더 솔직해졌다. “나 오늘 사실 별거 안 했어. 그냥 책 읽고, 좀 쉬었어.” 이런 말도 이제는 부끄럽지 않았다. 바쁘지 않은 시간이 꼭 의미 없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 시간이야말로 내 마음을 채우는 시간이 될 수 있었다.
여유가 주는 작은 행복
언젠가부터 우리는 바쁜 것이 당연한 세상에서 살고 있었다. “너 바쁘지?”라는 질문이 안부의 다른 이름이 되어버린 지금, 바쁘지 않다고 말하는 건 어쩌면 작은 용기가 필요했다. 하지만 그 용기는 내게 예상치 못한 자유를 주었다. 바쁘지 않아도 괜찮다는 사실. 하루를 꽉 채우지 않아도, 의미 없는 사람이 되는 건 아니라는 깨달음.
친구와 나는 그 자유를 조금 더 오래 누리기로 했다. 가끔은 바쁘게 움직여야 할 때도 있겠지만, 바쁨에 지쳐버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의식적으로 느리게 걸어보기로 했다. 오늘 하루, ‘바쁘다’는 말 없이 살아본다. 그 작은 도전이 내일을 조금 더 가볍게 만들 것임을 알기에.
바쁨을 내려놓는 하루, 당신도 함께해보지 않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