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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의 자유론(The Theory of Freedom)

by 정성균


어깨가… 뻐근하다 못해 돌덩이처럼 단단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나이 마흔, 쉰을 넘어서면 누구나 겪는 통과의례 같은 건가 싶다가도, 가만히 생각해 보면 단순히 몸의 피로나 노화 때문만은 아닌 듯합니다. 오랫동안 책임이라는 이름으로, 혹은 당연하다는 생각으로 꾸역꾸역 짊어지고 온 마음의 짐들 때문이겠지요. 젊을 때는 그 무게가 때론 성장의 증거처럼, 혹은 나를 지탱하는 기둥처럼 느껴지기도 했었습니다. 어쩌면 우리 세대가 짊어진 특유의 무게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치열하게 앞만 보고 달려왔던 시간들, 그 속에서 놓치고 얻었던 것들 뒤에 남겨진 복잡한 감정들 말입니다. 그런데 인생의 반환점을 돌아보니, 이제는 좀… 내려놓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집니다. 어깨를 짓누르는 그 무거움에서 벗어나, 조금은 가볍게 숨 쉬고 싶다는 마음. 혹시 저만 그런 것은 아니겠지요?


살아온 날들을 돌아보면, 참 많은 것을 쥐려 애쓰며 살아왔습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내려놓기 어려운 것 중 하나가 아마 남들과의 비교, 그리고 그와 복잡하게 얽힌 자존심이 아닐까 싶습니다. 동창들 소식이 들려오는 단톡방이나 오랜만에 나간 모임 자리에서, 누구는 어디로 승진했다더라, 자녀가 좋은 대학에 갔다더라, 이번에 새로 바꾼 차가 무엇이라더라… 그런 이야기들에 속으로 내 처지와 형편을 견주어보며 마음 졸이고, 때로는 밤잠 설친 적, 왜 없었겠습니까.


행여나 내가 뒤처져 보일까 봐, 나의 부족함이 드러날까 봐 괜찮은 척, 아무렇지 않은 척, 심지어는 더 잘 나가는 척하며 얼마나 애쓰며 살아왔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가면을 쓰고 지켜낸 체면과 자존심이 과연 지금의 나에게 무엇을 남겨주었을까요. 공허함이나 깊은 피로감은 아니었을는지요. 이제는 조금씩 인정하게 됩니다. 젊을 때는 성공이란 것이 더 높이 오르고 더 많이 갖는 것이라 믿었지만, 이 나이가 되어보니 행복은 그런 외적인 성취에만 있는 것이 아님을 어렴풋이 알게 됩니다. 오히려 소중한 사람들과 나누는 따뜻한 시간, 몸과 마음의 건강, 그리고 사소한 일상에서 발견하는 작은 기쁨들이 더 깊은 만족감을 준다는 것을요. 남들 기준에 맞추지 않아도, 나에게는 나만의 속도와 나만의 색깔이 있다는 것을요. 오히려 좀 부족해 보이고 허술해 보여도, 솔직하고 담담한 내 모습 그대로가 더 편안하고 자유롭다는 것을 말입니다.


지나간 시간에 대한 후회와 미련은 또 어떻고요. '아, 그때 그 사업을 시작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아이들 어릴 때 좀 더 시간을 함께 보냈어야 했는데', '그때 과감히 이직을 했더라면 지금 내 인생이 달라졌을까?'… 이미 흘러가 버려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의 선택들을 끊임없이 곱씹으며 '만약에'를 반복하는 거죠. 그 시절의 나로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갈 수만 있다면 전혀 다르게 살 텐데, 하는 부질없는 생각들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과거에 발목 잡혀 있을수록, 현재의 소중한 시간들만 속절없이 흘려보낼 뿐이라는 걸 이제는 압니다. 과거는 과거대로 그 나름의 의미가 있었겠지요. 그때의 경험과 선택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존재하는 것이고요. 지나온 길의 상처나 후회조차도, 결국 지금의 나를 더 깊고 단단하게 만들어준 밑거름이었음을 깨닫는 지혜. 그것이 어쩌면 우리 나이기에 가질 수 있는 값진 선물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저 담담히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배울 점을 찾고,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차분히 집중하는 것. 그것이 어쩌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 아닐까 싶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관계의 무게도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오랫동안 함께 해온 부부 사이에도 젊을 때와는 또 다른 문제들로 삐걱거리기도 하고, 다 큰 줄만 알았던 자녀들과는 생각지도 못한 소통의 벽 앞에서 당황하기도 하죠. 연로해지시는 부모님을 뵈면 마음 한구석이 아릿해오기도 하고요. 젊은 시절 전부 같았던 친구들과도 예전 같지 않음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각자 살아가는 환경과 가치관이 달라지면서 자연스레 거리가 생기기도 하고, 때로는 사소한 오해나 서운함이 쌓여 예전 같지 않은 관계가 되기도 합니다.


하고 싶은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라도 혹시 관계가 틀어질까 봐, 혹은 ‘나이 들어 속 좁다’는 소리를 들을까 봐 꾹꾹 눌러 담는 일도 부지기수입니다. 하지만 언제까지 나 혼자 끙끙 앓으며 속앓이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조금은 용기를 내어 진솔하게 마음을 표현하는 연습, 그리고 동시에 상대방의 입장과 마음도 너그럽게 헤아려보는 지혜.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성숙함. 우리 나이가 되면 더욱 필요한 덕목이 아닌가 싶습니다.


가끔 집안을 둘러보면 여기저기 쌓여있는 물건들이 꼭 내 마음의 상태를 보여주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언젠가 필요할 거라며 쉽사리 버리지 못한 잡동사니들, 빛바랜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소중히 끌어안고 있는 낡은 물건들… 이런 것들이 마치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인 걱정이나 미련, 혹은 떨쳐내지 못한 집착처럼 느껴지는 거죠. 해마다 받는 건강검진 결과에 대한 불안감, 노후 준비는 이대로 괜찮은 건지, 아이들은 과연 제 앞가림 잘하고 살아갈는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걱정들.


하지만 그런 걱정들이 마음의 공간만 차지하고 어깨를 무겁게 짓누를 뿐, 정작 현실적인 해결책이 되어주지는 않더라고요. 먼지 쌓인 물건들을 정리하듯, 마음속의 걱정거리들도 하나씩 분류하고 덜어내고 비워내는 작업이 꼭 필요합니다. 비움으로써 오히려 더 중요한 것을 채울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지요. 그래야 비로소 숨 쉴 틈이 생기고, 새로운 것들을 받아들일 여유도 생기지 않겠어요?


어느덧 인생의 오후, 혹은 저녁으로 접어드는 시간. 젊음의 치열함에서는 한 발짝 물러섰지만, 대신 아이들은 자라나 독립하고 부모님은 더 연로해지시니 어깨 위의 책임감은 또 다른 무게와 형태로 다가옵니다. 시간은 유한하다는 것을, 삶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이전보다 더 선명하게 느끼기에, 무엇을 붙잡고 무엇을 흘려보내야 할지 더 깊이 고민하게 되는 때이기도 하죠. 그래서 더욱, 지금 이 순간의 소중함과 내가 진정으로 추구하는 삶의 가치가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진지하게 묻게 됩니다.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려오느라, 정작 나 자신을 살뜰히 돌보는 데는 참 인색했던 것 같습니다. 일과 가족들 챙기느라 내 몸과 마음이 보내는 피곤하다는 신호, 힘들다는 아우성은 애써 외면하기 일쑤였죠. 어쩌면 이제는 조금 속도를 늦추고, 오롯이 나를 위한 시간을 내어주는 건 어떨까요? 따뜻한 차 한 잔을 앞에 두고 조용히 창밖을 바라보는 시간, 그동안 바빠서 읽지 못했던 책을 느긋하게 펼치는 시간, 혹은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고 편안하게 ‘멍하니’ 있는 시간… 그런 아주 사소하고 평범해 보이는 순간들이 사실은 얼마나 큰 위로와 깊은 충만감을 주는지 모릅니다. 예전에는 미처 몰랐던, 일상의 결 안에 보석처럼 숨겨진 시간들이죠. 속도를 늦추고 마음의 눈을 떠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동안 정말 애쓰며 살아온 나 자신에게 ‘괜찮다, 그동안 정말 애썼다’ 하고 따뜻하게 다독여주는 너그러움이 아닐까 싶습니다. 실수해도 괜찮고,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남들보다 조금 느려도 괜찮습니다. 그저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온 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하고 귀한 삶이니까요.


인생의 중간쯤, 혹은 그 너머에 서서 지나온 길을 돌아보니, 반짝이던 성취보다는 후회나 아쉬움이 더 많이 떠오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우리에겐 아직 가보지 않은 길, 새롭게 채워나갈 시간들이 있으니까요. 어쩌면 우리가 진정으로 다음 세대에게, 그리고 우리 자신에게 남겨야 할 것은 화려한 업적이나 물질적인 유산이 아니라,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보여준 따뜻한 마음, 함께 나누었던 소중한 웃음, 그리고 수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지켜내고자 했던 진실된 삶의 태도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나를 옭아매던 과도한 욕심이나 체면, 세상의 기준들을 조금 내려놓고, 보다 본질적이고 가치 있는 것들에 우리의 남은 시간과 마음을 쓰는 것이 더 의미 있지 않을까요?


완벽한 성공이나 대단한 성취를 이루지 못했더라도, 그저 어제보다 오늘 조금 더 마음 편안하게, 조금 더 어깨 가볍게 살아갈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삶이 아닐까요?


짊어지고 있는 무거운 짐들을 한꺼번에 다 내려놓을 수는 없겠지만, 그중에서 유독 나를 힘들게 하고 짓누르는 것 한두 개만이라도 의식적으로 내려놓는 연습을 시작해 보는 겁니다. 그렇게 조금씩, 아주 조금씩 가벼워지는 과정 속에서, 이전에는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삶의 소소한 기쁨과 감사함들을 새롭게 발견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당신의 남은 인생 여정이, 부디 조금 더 평온하고 자유롭고 가벼워지기를,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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