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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정원을 가꾸는 일

by 정성균

희미한 가로등 불빛이 아직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창문 너머로 스며드는 시간입니다. 서재 책상 앞에 깊숙이 몸을 묻고 앉아, 텅 빈 노트 위에 만년필을 가져가 봅니다. 종이 위를 스치는 사각거리는 잉크 소리, 새벽녘 서재에 감도는 옅은 커피 향만이 존재하는 듯한 이 순간, 저는 누구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고 저 자신과 조용히 마주합니다. 그리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그러나 마음 깊은 곳의 진심을 담아 되뇌곤 하죠. ‘어제보다 조금만 더. 아주 조금이라도 괜찮으니, 어제의 나보다는 괜찮은 사람이 되자.’


이것은 감상적인 자기 위로나, 새해 첫날에 떠올리는 의례적인 목표와는 다릅니다. 오히려 숨 가쁘게 돌아가는 하루하루 속에서 나 자신을 잃지 않으려는, 그리고 매일 부딪히는 수많은 선택 앞에서 조금 더 나은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려는, 저만의 소중한 다짐에 가깝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알아가는 것은, 인생이란 것이 내 뜻대로만 흘러가지 않는다는 지극히 평범한 진리입니다. 한때는 강한 의지만 있다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을 거라 믿었지만, 이제는 압니다. 세상을 바꾸는 거창한 일보다, 어쩌면 내 마음 하나 제대로 돌보고 가꾸는 일이 생각보다 더 꾸준한 애씀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요. 이제는 각자의 삶을 꾸려나가는 자녀들이 제 곁을 떠나고 아내와 단출하게 살아가면서, 제 안의 정원을 가꾸는 일의 의미가 더욱 각별하게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이 노력은 나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내가 조금 더 괜찮은 사람이 될 때, 그 긍정적인 기운이 아내에게, 그리고 함께 일하는 동료들에게도 흘러갈 수 있다고 믿기에. 혹은, 그저 내 삶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스스로에게 조금은 덜 미안하고 싶어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침이면 어김없이 비교적 조용한 하루가 시작됩니다. 제 출근 준비와 함께, 아내와 마주 앉아 나누는 따뜻한 차 한 잔의 시간이 있죠. 식탁에서 짧게 나누는 대화, 현관문을 나서기 전까지의 차분한 시간들. 그리고 집을 나서면 복잡한 출근길과 곧이어 마주할 직장에서의 여러 역할에 대한 무게감도 함께 느껴집니다. 끊임없이 밀려드는 업무와 의사결정의 순간들, 때로는 예측 불가능한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감정의 기복을 겪기도 합니다. 얼마 전, 예상치 못한 문제로 프로젝트가 지연되었을 때, 예전 같으면 조급함에 담당자를 다그치거나 직접 해결하려 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순간, 잠시 숨을 고르며 팀원들과 함께 상황을 전체적으로 보려 애썼습니다. 다그치기보다 차분히 경과를 듣고 함께 대안을 찾으려 노력했고, 의외로 팀원의 아이디어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던 기억이 납니다. 순간의 감정에 휘둘리지 않으려는 저의 작은 연습입니다. 제 표정 하나, 말 한마디가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 미칠 영향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죠(자제능력 / Self-control). 당장 상황을 바꿀 마법은 없다 해도, 적어도 그 상황에 어떻게 대처할지는 제가 선택할 수 있으니까요. 오늘 하루, 어제보다 조금 더 차분하게, 조금 더 너그러운 태도로 상황을 대하는 것. 그것이 제가 익혀가는 ‘현실에 적응(Adapting to reality)’하는 나름의 방식이랍니다. 눈에 띄는 변화는 아닐지라도, 그 과정 속에서 마음의 결이 조금씩 단단해짐을 느낄 때가 분명 있어요.


물론 매번 잘 해내는 건 아닙니다. 여전히 사소한 일에 발끈하고, 귀찮은 일은 뒤로 미루고 싶은 마음에 굴복하기도 하며, 때로는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또 팀을 이끄는 사람으로서의 책임감이나 이제는 다른 길을 걷는 자녀들에 대한 염려, 혹은 제 자신의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에 짓눌려 허우적거릴 때도 있습니다. 완벽한 사람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제 안의 모난 부분이나 부족함과 마주하는 건 여전히 쑥스럽고 쉽지 않은 일이죠. 하지만 중요한 건 넘어졌다는 사실 그 자체가 아니라, 넘어진 자리에서 다시 툴툴 털고 일어설 수 있는 마음 아닐까요? 그래서 저는 매일 밤 잠자리에 들기 전, 아주 잠깐이라도 오늘 하루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려 해요. 잘했던 일보다는 아쉬웠던 점, 마음에 걸리는 말이나 행동을 조용히 떠올려 봅니다. 자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음에는 조금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도록 기억하기 위해서예요. 그리고 다독이듯 약속합니다. 내일은 괜찮을 거라고. 이것이 제가 저에게 건네는 작은 믿음이자, 매일 새롭게 이어가는 ‘나와의 약속(Self-promise)’입니다.


예전에는 더 높은 자리, 더 가시적인 성취를 향해 달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사회가 제시하는 성공의 사다리를 오르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었죠. 그런데 우연히 다시 들춰본 루이자 메이 올컷의 『작은 아씨들』 속, 그들의 소박하지만 단단한 유대와 삶을 대하는 태도가 어딘가 마음을 건드렸습니다. 치열한 경쟁이나 화려한 성공담과는 다른 종류의 힘, 조용하지만 깊은 삶의 가치를 발견한 느낌이었죠. 행복은 어쩌면 우리가 그토록 쫓는 명예나 부 같은 외적인 조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 따뜻한 저녁 식탁이나 주말 오후의 평온함 같은, 지극히 평범하고 소소한 순간 속에 보석처럼 숨어있는 건 아닐까요? 퇴근 후 현관문을 열었을 때, 바깥세상의 소음과 긴장을 벗어두고 들어서는 집 안의 고요함, 늦은 밤 하루의 고단함을 나누는 아내와의 조용한 대화 속에서, 『작은 아씨들』이 보여준 그 소박하지만 귀한 가치들이 제 삶에도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음을 문득 깨닫습니다.


그 깨달음 이후, 저는 의식적으로 삶의 속도를 조절하며 주변을 살피는 연습을 합니다. 당장 필요하지 않은 것에 대한 욕심을 조금 덜어내고(자제능력 / Self-control), 퇴근 후나 주말에는 온전히 아내와 함께하는 시간을 가지려 노력합니다. 때로는 익숙한 길 대신 새로운 길로 드라이브를 하거나, 평소에는 잘 듣지 않던 장르의 음악을 찾아 듣기도 하죠(창의성 개방 / Creative openness). 이런 작은 시도들은 제게 세상을 조금 다른 눈으로 보게 하고, 일상에 작은 생기를 불어넣어 줍니다. 전문적인 지식이 아니더라도,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새로운 것을 배우려는 자세(지식탐구 / Knowledge exploration) 역시 저를 무뎌지지 않게 하는 것 같아요. 창밖으로 들리는 빗소리가 마음을 차분하게 할 때, 문득 떠오른 생각을 짧게 메모해보기도 합니다.


또한, 나 혼자 잘 사는 것만으로는 결코 삶이 충만해질 수 없다는 것을 점점 더 느끼게 됩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얽혀있는 관계 속에서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아가지요. 아내, 이제는 성인이 되어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자녀들, 연로하신 부모님, 오랜 친구들, 그리고 함께 일하는 동료들, 특히 제가 이끌고 있는 팀원들과의 관계 또한 소중하게 생각합니다(환경에 맞게 / Social adaptation). 제가 속한 이 관계들 안에서, 가정에서는 든든한 동반자이자 기댈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사회에서는 믿고 함께 일할 수 있는 동료이자 좋은 선배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어제보다 나은 나’를 향한 여정에 중요한 동기 부여가 됩니다. 아내의 이야기에 좀 더 귀 기울여주고, 가끔씩 안부를 전해오는 자녀들과의 대화에 더 마음을 쓰고, 친구의 고민을 진심으로 들어주고, 동료에게는 격려와 함께 작은 도움을 건네는 일들을 통해, 저 역시 관계 속에서 함께 자라고 있음을 느낍니다.


‘어제보다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 이것은 결승선이 정해져 있는 경주가 아니라, 어쩌면 평생 이어질 긴 산책과 같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때로는 가파른 언덕을 만나 숨이 차고, 때로는 안갯속에서 길을 잃고 헤맬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중요한 것은 완벽한 모습으로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나만의 속도로 걸어가는 그 과정 자체가 아닐까요?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남들과 보폭을 맞추려 애쓰지 않아도 됩니다. 그저 어제의 나보다 아주 작은 한 뼘이라도 나아졌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요. 그렇게 꾸준히 걷다 보면, 언젠가는 사소한 바람에도 쉽게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나무처럼, 내면의 평화를 조금 더 누릴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기대해 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하는 아내에게 조금 더 기댈 만한 사람이, 함께 일하는 이들에게는 좋은 길잡이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밤, 다시 서재 책상 앞에 앉아 하루를 가만히 되짚어봅니다. 여전히 모자라고 아쉬움이 남는 부분들이 많지만, 그래도 작은 약속들을 지키려 애썼던 마음들, 감정의 소용돌이 앞에서 잠시 멈춰 숨을 골랐던 순간들, 주말 오후 아내와 함께 거실 창가에 앉아 나누었던 편안한 침묵의 기억, 오랜만에 찾아온 자녀들과 함께한 저녁 식탁의 온기 같은 소소한 감사의 조각들이 떠오릅니다. 이 작은 기억들이 제 안에 차곡차곡 쌓여, 내일의 저를 오늘보다 조금 더 괜찮은 사람으로 만들어 주리라 믿어봅니다. 새벽녘에 속삭였던 그 다짐을 다시 한번 마음에 품으며, 저는 조용히 내일을 기다립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각자의 속도로 자신의 정원을 가꾸며 살아가는 정원사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의 정원에는 오늘, 어떤 씨앗을 심으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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