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문득, 정말 예고 없이,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감각이 온몸으로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잡힐 듯 말 듯 아른거리는 기억의 조각들은 손가락 사이로 부서져 흩어지고, 한때는 바로 곁에 있던 온기 가득한 얼굴들도 이제는 희미한 안갯속 풍경처럼 아득하기만 합니다. 그토록 간절히 붙잡고 싶었던 마음들, 영원할 것 같던 다짐들조차도 세월의 강물 위에서 저마다의 물길을 따라 흘러가 버렸습니다.
늘 나름의 방식으로 최선을 다해왔다고 스스로를 다독여 보지만, 가만히 걸어온 길을 돌아보면 그 속에는 차마 소리 내어 말하지 못했던 조심스러운 후회들이 숨 쉬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어떤 결정은 예상보다 깊은 흔적을 남겼고, 어떤 망설임과 기다림은 끝내 이름 붙일 수 없는 마음의 생채기로 남아 가슴 한편을 저미곤 합니다. 그저 앞만 보고 열심히 달려온 줄 알았는데, 마음 곳곳에는 미처 보내지 못한 시간의 조각들이 여전히 남아 반짝입니다.
살면서 꽤 늦게서야 알게 된 것 중 하나는, 바로 나 자신을 따뜻하게 안아주는 방법이었습니다. 타인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 입장을 이해하는 일은 때로는 어렵지 않았지만, 정작 내 안의 상처와 마주하고 스스로를 너그럽게 용서하는 과정은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습니다. 어리석었던 실수들은 그저 시간이 지나면 희미해지고 자연스레 잊힐 거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웬걸, 시간은 오히려 기억의 렌즈를 더 선명하게 닦아놓는 듯했습니다. 그날의 불안했던 눈빛, 차마 내뱉지 못하고 삼켰던 말들, 끝내 외면하고 돌아서던 뒷모습까지,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또렷하게 떠오르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한때는 완벽함이라는 이상향을 향해 숨 가쁘게 달리던 날들도 있었습니다. 여기서 조금만 더 힘을 내면, 조금만 더 빈틈없이 해내면 모든 것이 괜찮아지고 원하는 모습에 가닿을 수 있을 거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삶이란 언제나 우리의 예상을 비껴가는 방향으로, 때로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모습으로 흘러가곤 했습니다. 어느 낯선 골목길에 멈춰 서서, 마치 손에 쥔 지도를 통째로 잃어버린 듯 막막함에 숨이 막혔던 순간에도, 이상하게도 발걸음은 완전히 멈추지 않았습니다.
길을 잃었다는 생각에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고 싶었던 날들이 참 많았습니다. 하지만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길을 잃었다고 생각했던 바로 그 자리에서,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새로운 풍경과 마주하게 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너무 멀리 돌아온 것은 아닐까 자책했던 그 길 위에서, 이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내 안의 또 다른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흘려보낸 하루 때문에 스스로를 미워하기도 했습니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 틈에서 나 혼자만 뒤처지는 것 같아 불안하고 초조했던 시간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상 모든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고유한 속도와 시간이 있다는 사실을 조금씩 받아들이면서, 조급했던 마음에 여유가 깃들기 시작했습니다. 숨 가쁘게 달려야 할 때가 있다면, 잠시 걸음을 멈추고 숨을 골라야 할 때도 있다는 것을, 느리지만 분명하게 배워나갔습니다.
마음이라는 것은 참으로 다루기 어려운 존재입니다. 어떤 날에는 아주 작은 상처 하나에도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고, 또 어떤 날에는 커다란 시련 앞에서도 놀라울 만큼 의연하게 서 있기도 했습니다. 그 수많은 엇갈림과 흔들림의 순간들을 지나오며 어렴풋이 알게 된 것은, 사람의 마음이란 결코 일정하거나 예측 가능한 형태로 머물러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나를 아프게 하는 이 감정이, 어쩌면 내일의 나를 지켜줄 단단한 무언가가 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슬픔이라는 감정은 결코 한순간에 폭풍처럼 지나가지 않았습니다. 아주 사소한 일에도 쉽게 마음이 내려앉고, 오래도록 아물지 않는 상처를 부적처럼 끌어안고 살아가야 하는 날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토록 고요하고 무겁게만 느껴졌던 시간 속에서도, 분명 어딘가에서는 아주 미세한 변화들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마치 두터운 구름 사이로 한 줄기 햇살이 스며들 듯, 혹은 얼어붙은 땅 위로 조용히 새싹이 피어나듯, 마음속 가장 깊은 곳 어딘가에서도 희미하지만 분명한 빛이 피어나고 있음을 감지했습니다.
외로움은 처음에는 예고 없이 찾아온 손님 같았지만, 어느새 익숙한 이웃처럼 내 삶의 한 켠에 자연스럽게 머물게 되었습니다. 누군가를 붙잡으려 애쓰고, 관계 속에서 나의 존재 이유를 찾으려 했던 어린 날의 절박함은,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스스로를 깊이 들여다보는 일로 변화해갔습니다. 어떤 관계는 끝을 맺었지만, 그 끝이 반드시 실패나 상실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더 이상 상처가 되지 않기 위해, 아프지만 놓아야만 했던 손도 분명히 존재했습니다.
여전히 아쉬움과 미련을 깨끗하게 다 털어내지는 못한 채 살아온 날들이 더 많습니다. 마음 한편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어떤 이름 앞에서, 혹은 불현듯 떠오른 지나간 장면 앞에서 잠시 마음이 흔들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마음들을 억지로 누르거나 외면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그 자리에 머물도록 놓아두기로 했습니다. 모든 감정이 반드시 깨끗하게 정리되거나 지나가야만 하는 것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때로는 그저 그 감정 그대로, 그 자리에 머물러 있어도 괜찮다는 것을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지나온 시간을 찬찬히 돌이켜보면, 그때 내렸던 수많은 결정들이 결코 완벽하거나 현명했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어설프고 불완전했던 선택들이 하나하나 쌓여 지금의 나라는 존재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 또한 부정할 수 없습니다. 무엇이 정답인지 몰랐기에 오히려 용기를 낼 수 있었고, 스스로 부족하다고 느꼈기에 더 넓은 세상을 배우고 더 많은 것을 마음에 담을 수 있었습니다.
어느 날 문득, 아주 오래전 내가 내렸던 어떤 선택을 떠올리며 잠 못 이루는 밤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그때 내가 조금만 더 다정한 말을 건넸더라면, 그때 내가 조금만 더 용기를 내어 다른 길로 걸어갔더라면, 지금의 나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하는 부질없는 상상을 해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 생각들이 여전히 마음 한구석을 아리게 할지언정, 설령 시간을 되돌려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 해도 과연 내가 지금과는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을지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그 순간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믿는 선택을 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 선택의 결과는 오직 시간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알 수 있습니다. 시간은 때로는 우리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때로는 예상치 못한 선물을 안겨주기도 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그저 지나간 모든 것들을 가슴에 품고, 다가오는 하루하루를 묵묵히 살아갈 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부끄러운 기억들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돌이켜보면 나도 모르게 이기적이었던 순간, 의도치 않게 누군가의 마음에 상처를 남겼던 날들도 있었습니다. 그런 기억들은 여전히 가슴 아픈 얼룩으로 남아 있지만, 바로 그 모든 실수와 과오들이 거름이 되어 지금의 마음이 자라나고 있다고 믿고 싶습니다.
흔히들 이야기하는 소위 "완벽한 삶" 같은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제는 받아들입니다. 크고 작은 흔들림과 불안, 어쩔 수 없이 저지르게 되는 실수와 그로 인한 후회의 조각들이 한데 모여 비로소 삶이라는 하나의 다채로운 풍경을 만들어내는 것 같습니다.
중국의 고전인 《채근담(菜根譚)》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무릇 세상사는 평탄하기를 바라기보다, 평탄하지 않음을 기대하라." 이는 곧, 늘 순탄하고 평탄한 길만을 기대하며 살기보다는, 때로는 험난하고 어려운 길 위에서도 마음의 중심을 잃지 않고 나아갈 수 있는 자세를 기르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젊은 날에는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뛰고 설레었던 것들이, 시간이 흐르고 나이가 들면서 때로는 어깨를 짓누르는 무거운 짐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은 단 한 순간도 같은 모양으로 머물러 있지 않고 끊임없이 흘러가며, 바람 또한 늘 다른 방향으로 불어옵니다. 어쩌면 변화라는 것은 두려워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가장 분명한 증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가끔은 이름도 모르는 낯선 골목길을 정처 없이 걸으며, 익숙하지 않은 풍경을 가만히 바라보는 저녁 시간을 갖습니다. 세상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다 해도, 그저 그런 시간을 보내고 있는 나 자신에게 작은 미소를 건넬 수 있는 그런 고요한 저녁이 참 좋습니다. 더 이상 원대한 꿈을 꾸지 않더라도, 주어진 하루를 소박하게 살아내고 그 안에서 작은 기쁨들을 발견하는 이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것인지 이제는 알 것 같습니다.
살면서 참 많은 것들을 잃어버렸습니다. 소중했던 사람들, 빛나던 시간들, 그리고 순수했던 마음들까지.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무언가를 잃어버리고 나서야 비로소 그것이 얼마나 소중했는지를 깨닫게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내가 현재 가지고 있는 것들만큼이나, 내가 잃어버린 것들 또한 지금의 나를 만들고 형성하는 중요한 일부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후회라는 감정은 어쩌면 삶을 조금씩 갉아 먹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삶의 빈 곳을 채우고 더 깊은 의미를 부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때는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아 마음 깊은 곳에 꼭꼭 덮어두고 싶었던 기억들조차도, 시간이 흘러 언젠가는 담담하게 꺼내어 가만히 바라볼 수 있는 날이 오기도 합니다. 어떤 기억은 여전히 날카로운 통증으로 남아 있지만, 또 어떤 기억은 시간의 무게를 견뎌내고 마침내 따뜻한 온기를 품게 되기도 합니다.
오늘도 나는 여전히 실수하고, 여전히 미래를 두려워하고, 때로는 아주 작은 일에도 속절없이 무너져 내립니다. 하지만 그 모든 불완전함 속에서도, 아주 조금씩이지만 분명 앞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후회가 전혀 없는 삶이란 아마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후회가 있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가 지난 시간들을 뜨겁고 치열하게 살아왔다는 선명한 흔적일지도 모릅니다.
내가 지나온 길 위에 희미하게 남겨진 발자국들을 가만히 바라봅니다. 서툴렀지만, 그때의 나에게는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넘어지고 무너졌지만, 결국에는 다시 일어섰습니다. 끊임없이 흔들렸지만, 그 흔들림 속에서도 나는 분명 조금씩 자라고 있었습니다.
지금 내가 살아 숨 쉬고 있는 이 순간 또한, 언젠가는 아련한 기억의 한 조각이 되겠지요. 그리고 먼 훗날 나는, 그 기억 속에서 바로 오늘의 나를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괜찮습니다. 설령 괜찮지 않다고 느껴지는 날들이라 할지라도, 그 시간들 또한 결국에는 다 지나갈 테니까요.
살아간다는 것은 어쩌면, 그렇게 요란한 구호나 다짐 없이도, 조용히 그리고 꾸준히 이어져 나가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