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엔 왜였을까. 늘 마시는 커피인데, 창밖으로 스며드는 햇살도 어제와 다르지 않은데, 문득 그 서점 생각이 파고들었다. 이젠 가뭇없이 사라져 버린, 한 시절 나의 도피처가 되어주었던 그곳. 코를 킁킁거리면 맡아질 것 같은 책 먼지 냄새, 손으로 쓸면 느껴질 듯한 낡은 소파의 감촉, 책갈피 사이에 숨겨져 있던 누군가의 비밀스러운 속삭임 같던 쪽지들까지. 마치 봉인되어 있던 기억의 상자가 예고 없이 열린 듯, 모든 것이 바로 지금 눈앞의 일처럼 생생하게 다가왔다. 정말이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왜 하필 오늘 아침이었을까. 무언가 특별한 계기라도 있었던 걸까, 아니면 그저 오래된 기억들이 제멋대로 고개를 든 것일까. 어쩌면 오늘따라 유난히 가라앉은 아침 공기가 그 시절, 그 공간의 침묵을 닮아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유가 무엇이든, 나는 잠시 눈을 감고 다시 그 서점의 삐걱이는 문을 밀고 들어선다. 그 시절 속으로.
그 서점 가장 안쪽 구석에는 오래된 가죽 소파가 하나 놓여 있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듯한 그 자리는 볕도 잘 들지 않았다. 짙은 갈색 가죽은 세월을 정통으로 맞아 군데군데 해지고 닳아 속살마저 희끗하게 보였지만, 그마저도 그 소파만이 가질 수 있는 연륜의 무늬처럼 느껴졌다. 그곳은 서점의 다른 공간과는 확실히 다른 밀도, 다른 온도를 가진 듯했다. 책 먼지와 오래된 종이 냄새, 그리고 그곳을 거쳐 간 수많은 사람들의 희미한 체취 같은 것이 뒤섞여 묘하게 마음을 가라앉히는 공기를 만들었다. 그 소파는 분명 누군가 오랫동안 끌어안듯 아꼈던 자리였으리라. 몸이 닿았을 자리는 깊숙이 파여 있었고, 팔걸이 부분은 수없이 쓸렸을 듯 반질반질 윤이 났다. 하지만 내가 드나들던 그 시절엔 어찌 된 일인지, 그 소파는 대부분 비어 있었다. 마치 약속 시간을 훌쩍 넘겨버린 주인을 기다리는 늙은 개처럼, 혹은 계절이 바뀌어도 미처 떠나지 못한 지난 시간의 그림자처럼, 쓸쓸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처음 그 소파에 이끌리듯 앉았던 날은 유난히 마음 둘 곳 없던 날로 기억한다. 뚜렷한 이유나 목적이 있었던 건 아니다. 어쩌면 세상으로부터, 혹은 나 자신으로부터 한 발짝 달아나고 싶었던 날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발길이 닿는 대로 흘러 들어간 낯선 골목의 작은 서점에서, 유독 그 소파만이 나를 부르는 듯했다. 마치 오래전부터 그 자리만이 나의 자리였던 것처럼, 너무나 자연스럽게 몸이 그곳으로 향했다. 소파에 깊숙이 몸을 묻자, 묵직하게 삐걱이는 소리와 함께 시간이 켜켜이 쌓여 만들어진 더께(겹겹이 쌓이거나 끼어서 굳어진 것)의 감촉이 느껴졌다. 그 순간만큼은 할 말이 없었다. 아니, 어떤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소란스러운 세상의 모든 소음으로부터 완전히 차단되고 싶었다. 다행히 그곳에서는 누구도 말을 걸지 않았고, 불필요한 시선을 던지지도 않았다. 그저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투명 인간처럼 잠시 머물 수 있었다. 사방의 책들은 저마다의 이야기를 품은 채 거대한 숲처럼 조용히 서 있었고, 나는 그 깊은 침묵 속에서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러다 무심코 시선이 닿은 곳에, 한 권의 책이 놓여 있었다. 누군가 방금까지 읽다 급히 두고 간 듯, 책갈피 대신 구겨진 영수증 조각이 삐죽이 제 존재를 알리고 있었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The Remains of the Day』. 익숙하면서도 낯선 작가의 이름 아래 적힌 그 영어 제목은, 그 자체로 하나의 쓸쓸하고도 아련한 풍경화를 보는 듯했다. 제목부터가 어딘지 모르게 마음 한구석을 건드리는, 지나간 시간을 끊임없이 되돌아보게 만드는 이름이었다. 누가 이 책을 여기에 두고 갔을까. 어떤 마음으로 이 페이지들을 넘겼을까. 그런데 정말 이상하게도, 그 제목이 당시 갈피를 잡지 못하던 내 마음과 너무나 닮아 있었다. 미처 정리하지 못한 과거의 기억들, 빛바랜 시간의 잔해들 사이를 하염없이 부유하는 듯한 그 막막함과 말이다.
그 무렵 나는 자주 어딘가로 숨어들 궁리를 했다. 시도 때도 없이 울려대는 휴대폰 알림들 사이에서, 무수한 관계의 그물망 속에서, 때로는 걷잡을 수 없이 소란스러워지는 내 마음으로부터도. 어디든 좋으니 잠시 몸을 숨길 곳이 절실했다. 그러다 문득, 책이라는 완벽한 세계 속으로 숨어드는 방법을 깨달았던 것이다. 책장을 넘기는 사락이는 소리, 오래된 책에서 나는 특유의 냄새, 손끝으로 느껴지는 종이의 미세한 질감, 그 위에 고스란히 새겨진 활자들이 만들어내는 고요하고 단단한 세계. 그곳은 현실의 어떤 소음도, 어떤 시선도 감히 침범할 수 없는 절대적인 나만의 피난처였다. 표지를 열고 첫 문장을 읽는 순간, 현실과 통하는 문이 소리 없이 닫히고 전혀 다른 시간, 다른 공간의 문이 스르르 열리는 듯한 기분. 복잡하게 엉겨 붙은 마음들을 하얀 종이와 검은 활자 사이에 납작하게 눌러 담으면, 잠시나마 어깨를 짓누르던 보이지 않는 삶의 무게가 거짓말처럼 가벼워지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어쩌면 그것은 단순한 착각이 아니라, 아주 잠깐이었을지언정 진짜 자유를 맛보는 순간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오늘 아침의 나는 생각한다.
서점 주인은 늘 말이 없는 중년의 여인이었다. 좀처럼 표정을 읽기 힘든 무심한 얼굴과 느리고 조용한 몸짓이 그녀의 전부인 듯 보였다. 그녀는 손님이 어떤 책을 들추는지, 얼마나 오래 그곳에 머무는지 굳이 묻거나 쓸데없는 관심을 보이는 법이 없었다. 그저 계산대 안쪽,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자신만의 작은 공간에서 묵묵히 책을 읽거나 때로는 멍하니 창밖을 내다볼 뿐이었다. 계산을 할 때조차 필요 이상의 말은 나누지 않았다. 조용히 책값을 치르고, 아무런 장식도 없는 얇은 종이봉투에 책을 담아 건네는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무심함이, 서로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듯한 그 적절한 거리감이 오히려 숨 막히는 세상에서 건네받는 더 없는 배려처럼 느껴져 편안했던 기억이 선명하다. 그 서점이 언제 처음 그 자리에 문을 열었는지, 왜 하필이면 이렇게 외진 골목에서 그토록 오랜 시간 서점을 지키고 있는지 문득 궁금했지만, 끝내 묻지 못했다. 어쩌면 우리 사이에는 이미 눈빛과 침묵만으로 이루어진, 보이지 않는 약속 같은 것이 존재했는지도 모른다. 서로의 고독한 영역을 함부로 침범하지 않을 것, 그저 각자의 방식으로 이 공간에서의 ‘머무름’을 묵묵히 지켜봐 줄 것. 그 침묵의 교감이 역설적이게도 그 공간을 더 깊고 아늑하게, 나만의 비밀 장소처럼 만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의 일이었다. 그날도 평소처럼 소파에 앉아 책장을 뒤적이던 중, 무심코 펼쳐든 낡은 시집 사이에서 반듯하게 접힌 작은 메모지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세월에 빛이 바랜 듯 누르스름한 색깔, 곱게 매만져 접힌 자국으로 보아 꽤 오랫동안 그 자리에 숨죽이고 있었던 듯했다. 낯선 이의 필체였다. 정체 모를 호기심과 아주 약간의 설렘으로 떨리는 손가락 끝으로 메모지를 조심스럽게 펼쳤던 그 순간의 공기가 지금도 느껴지는 듯하다.
“읽고 있나요? 여긴 조용해서, 마음이 들켜요.”
짧은 문장. 꾸밈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담백하기 그지없는 글씨체에서 쓴 사람의 마음결이 선명히 전해지는 듯했다. 그런데 그 글귀를 가만히 들여다보는 순간, 숨이 잠시 멎는 듯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눈가가 뜨거워졌다. 누가 썼는지, 언제 남겼는지, 혹 나를 향한 메시지가 아닐지라도 아무 상관없었다. 중요했던 것은 단 하나,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가 나와 비슷한 이유로 이 공간을 찾았고, 비슷한 감정을 느꼈으며, 자신의 마음 한 조각을 이렇게 책 사이에 비밀 신호처럼 남겨두었다는 사실 그 자체였다. 들키고 싶지 않아 찾아든 공간에서, 역설적이게도 가장 여린 속마음을 들켜버린다는 그 고백. 그것은 결코 나 혼자만의 비밀스러운 경험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름 모를 타인이 건네는 은밀한 공감과 위로는 생각보다 깊고 따뜻하게 심장에 가닿았다. 혼자가 아니라는 희미하지만 분명한 느낌. 어쩌면 세상의 모든 외로운 이들은, 이렇게 보이지 않는 실과 쪽지들로 연결되어 서로의 존재를 더듬고 조용한 안부를 묻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그때 진심으로 생각했다.
그 후로 나는 책을 고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곳에 머물기 위해 서점을 찾았다. 어쩌면 오래전부터 기다리고 있던 무언가를 다시 만나러 가는 길이었는지도 모른다. 혹시 서가의 그늘진 어딘가에 또 다른 쪽지가 숨겨져 있지는 않을까 하는, 설레면서도 조심스러운 기대감이 마음 한구석에 늘 자리 잡게 되었다. 오래된 소설책의 마지막 장에서, 두꺼운 철학 서적의 밑줄 그어진 페이지 사이에서, 때로는 표지가 해진 그림책의 천진한 삽화 뒤에서, 그렇게 하나둘씩 낯선 이의 짧은 기록들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오래된 지도 위에 표시된 비밀스러운 표식을 따라 숨겨진 보물을 찾아 헤매는, 조금은 불안하고 외로운 탐험가의 여정과도 같았다. 책장 사이를 조심스럽게 더듬으며 그 보이지 않는 이의 흔적을 찾는 동안, 손끝에 바스락거리는 쪽지의 감촉이 느껴질 때면 심장이 가만히 내려앉는 기분이 들곤 했다.
“오늘은 창밖으로 여름비가 내려요. 잠시 더위를 식혀주는 비가 고맙네요.”
“이 페이지를 읽다가 문득, 웃음이 났어요. 당신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길을 잃은 기분일 땐, 잠시 이곳에 와서 숨을 고릅니다. 책 냄새는 길을 알려주지 않지만, 잠시 쉬어갈 등받이를 내어주니까요.” "창가에 둔 작은 화분에 꽃이 피었어요. 생명은 참 조용히 자라나네요. 우리 마음 안의 무언가도 그렇겠죠?"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이의 속삭임들. 그것은 누구에게도 부치지 못한 편지 묶음 같기도 했고, 혼자만 간직하기에는 너무 무거웠거나 혹은 너무 소중해서 흘려보낸 마음의 조각들처럼 보이기도 했다. 짧은 문장들 속에는 고독의 깊이와 사색의 흔적, 찰나의 기쁨과 희미한 슬픔, 그리고 무심코 지나쳤을 일상의 작은 발견들이 섬세한 결로 새겨져 있었다. 그 글귀들을 하나씩 소중히 주워 모으며, 나는 점점 그 보이지 않는 사람의 삶 속으로, 그의 내면의 풍경 속으로 아주 조금씩 발을 들여놓는 기분이었다. 때로는 그의 웃음기 섞인 문장에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고, 때로는 그의 쓸쓸한 독백에 가만히 마음을 포개었다. 우리는 단 한 번도 만난 적 없고, 어쩌면 영원히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이 낡은 책장 사이, 빛바랜 쪽지 위에서 세상 누구보다 가장 내밀한 부분을 공유하고 있는 비밀스러운 친구가 된 것만 같았다.
그 후로 나는 책을 고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곳에 머물기 위해 서점을 찾았다. 어쩌면 오래전부터 기다리고 있던 무언가를 다시 만나러 가는 길이었는지도 모른다. 멀리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나 자동차 경적 같은 바깥세상의 생동하는 소음과는 대조적으로, 서점 안은 여전히 다른 시간이 흐르는 듯 깊은 정적에 잠겨 있었고, 특유의 평온함과 속 깊은 아늑함이 감돌았다. 이제는 내 지정석처럼 익숙해진 그 소파에 몸을 기대고 앉아, 새로 발견한 쪽지를 읽었던 어느 나른한 오후였다. 평소보다 조금 더 힘이 들어간 듯한, 어쩌면 어떤 다짐 같은 것이 느껴지는 글씨체에 시선이 오래 머물렀다.
“어둠 속에서도 길을 찾는 별처럼, 당신의 이야기도 빛나고 있을 거예요.”
그 문장을 오랫동안, 몇 번이고 되뇌었다. 이것은 나에게 하는 말일까, 아니면 스스로에게 건네는 간절한 주문일까. 혹은 이 쪽지를 발견할지 모를 또 다른 누군가를 향한 이름 없는 응원일지도 몰랐다. 어떤 의미였든 간에, 그 문장은 캄캄한 밤하늘에서 길을 잃은 이에게 방향을 알려주는 희미한 별빛처럼 내 마음속에서 작지만 분명한 빛을 내는 듯했다. 그 빛을 가만히 따라가다 문득 생각했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자신만의 고유한,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이야기를 가슴 깊이 품고 살아가는 존재가 아닐까 하고. 다만 살아가면서 그 이야기의 소중함을 잊거나 스스로 퇴색시키거나, 혹은 어디서부터 어떻게 그 실마리를 풀어내야 할지 몰라 망설이고 있을 뿐이라고. 타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위로받는 동안, 어쩌면 나도 모르게 아주 조금씩, 그러나 분명하게, 스스로의 이야기를 세상 밖으로 꺼내놓을 용기를 얻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오래전 릴케가 말했듯, 어쩌면 사랑이란 “서로를 보호하고 경계하며 인사하는 두 개의 고독”일지도 모른다는 문장을 그 어느 때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이름 없는 교감 또한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을까. 직접 마주하지 않기에 오히려 더 깊이 솔직해질 수 있었던, 서로의 그림자 같은 고독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책갈피 사이에 몰래 숨겨둔 언어로 조용히 온기를 나누던 그 신비롭고도 따뜻했던 행위.
얼마나 많은 오후를 그곳, 그 소파 위에서 흘려보냈을까. 그 서점에서의 시간은 바깥세상과는 다른 속도로, 전혀 다른 결로 흘러가는 듯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불현듯 깨달았다. 언제부턴가 나는 더 이상 어떤 특정한 책 자체를 고르러 그곳에 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책은 어쩌면 이 특별한 공간을 찾아들기 위한, 혹은 그 낡고 비밀스러운 소파에 다시 한번 몸을 뉘기 위한 가장 그럴듯한 핑계였을 뿐이었다. 내가 진정으로 찾아 헤매던 것은, 길 잃은 마음을 잠시 세상의 모든 소음과 분주함으로부터 완벽히 차단한 채 내려놓을 수 있는 고요한 항구 같은 공간, 그리고 그 침묵의 공간 속에서 우연히 발견하게 된 타인의 예상치 못한 온기, 나아가서는 그 따스한 온기를 통해 마침내 마주하게 되는 나 자신의 진짜 마음이었음을. 누군가의 온기가, 혹은 나 자신의 온기를 확인할 작은 증거 하나가 그토록 간절히 필요한 시절이었을까? 아마도,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랬던 것 같다. 이제 그 서점은 내 기억 속에서 책들의 집합소라기보다, 흩어진 마음의 조각들이 잠시 머물다 떠나가는, 혹은 길 잃은 이야기들이 다음 행선지를 기다리는 오래된 간이역 같은 풍경으로 남아있다.
어느 날, 그날은 유독 오랫동안 그 자리에 머물렀던 것으로 기억한다. 늘 앉던 소파 옆, 닳고 닳은 작은 원목 테이블 위에 놓인 낡은 노트 한 권을 발견했다. 표지가 손때에 반질거리고 모서리가 둥글게 닳아있는, 제법 두께가 있는 평범한 줄 노트였다. 이전에는 분명 그 자리에 없었던 것이었다. 마치 그날, 바로 그 순간에 내가 발견해 주기를 오랫동안 그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조심스럽게, 마치 오래된 비밀이 담긴 상자를 열듯 노트 표지를 넘겼다. 각기 다른 필체로 채워진 페이지들이 차례로 나타났다. 누군가는 좋아하는 시 구절을 정성껏 옮겨 적어두었고, 누군가는 떠오르는 짧은 감상을, 또 다른 누군가는 자신만이 알아볼 수 있는 서툰 그림을 남겨두었다. 그 서점을 아꼈던, 이름 모를 수많은 방문자들이 남긴 꾸밈없고 진솔한 마음의 흔적들이었다. 그렇게 한 장 한 장 넘기다 노트의 거의 마지막 장에 이르렀을 때, 그간 숱한 쪽지들을 통해 이미 익숙해진 그 필체가 마법처럼 눈에 들어왔다. 그 필체로 쓰인 쪽지가 마지막 페이지 위에 가지런히 붙어 있었다.
“이곳에서 당신의 위로를 찾았듯, 누군가에게 당신의 이야기가 위로가 될지도 몰라요. 다음 페이지는 당신이 쓸 차례예요.”
그것을 읽는 순간, 정말이지 잠시 숨을 멈췄다. 그리고 심장이 크게 한 번 쿵, 하고 내려앉았다. 마치 아주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신호를 마침내 받은 것처럼. 더 이상 숨어서 읽기만 하는 그림자 같은 존재가 아니어도 괜찮다는, 이제는 당신의 목소리를 세상에 내어도 좋다는 따뜻하고도 단호한 허락처럼 느껴졌다. 늘 비어 있던, 때로는 한없이 외롭게만 보였던 그 낡은 소파가 그 순간만큼은 전혀 다르게 보였다. 그저 낡고 오래된 가구가 아니라, 수많은 이야기들이 스며들고 머물다 간, 그리고 새로운 이야기가 움트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비옥한 토양처럼, 혹은 이제 막 스포트라이트가 켜지기를 기다리는 작은 무대처럼 느껴졌다.
가방 속에서 늘 무심코 가지고 다니던 작은 펜을 꺼냈다. 노트의 깨끗하게 비어있는 다음 페이지 위에 펜촉을 가져갔다. 새하얀 백지 위에서 펜 끝이 잠시 길을 잃은 듯 머뭇거렸다. 무슨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할까.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어내야 할까. 머릿속에는 수많은 생각과 감정들이 뿌연 안개처럼 떠다녔지만, 이상하게도 두렵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창밖으로는 어느덧 해가 서쪽으로 많이 기울어 늦은 오후의 부드럽고 긴 햇살이 서점 안으로 사선으로 깊숙이 들어오고 있었다. 공기 중에 떠다니던 먼지들이 그 따스한 빛줄기 속에서 금가루처럼 반짝이며 느리게 춤을 추었다. 서점 안의 노란 백열등 불빛이 그 햇살과 부드럽게 섞이며 공간을 더욱 아늑하고 비밀스러운 분위기로 감쌌다.
첫 문장을 적기 시작했던 그 순간의 감각, 그 공기의 온도와 냄새가 오늘 아침, 이렇게 불현듯 되살아났다. 아주 천천히, 한 글자 한 글자 마음을 담아 눌러썼던 기억. 서점 한구석, 낡은 소파에 대한 이야기부터. 그리고 그곳에서 우연히 발견했던 작고 따스한 온기들과 이름 모를 누군가와의 신비로운 교감에 대한 이야기부터. 물론 서툴고 투박하기 짝이 없는 문장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괜찮았다. 중요한 것은 마침내 나만의 이야기를 시작했다는 사실이었으니까.
그렇게 그날, 지금은 무심한 포크레인 소리와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진 그 서점의 낡은 소파 앞에서, 나의 이야기는 조용히 첫 페이지를 넘겼던 것이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 많은 것이 변했고 기억 속의 그 아늑했던 공간은 이제 어디에도 없지만, 이상하게도 그곳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여전히 내 안에 또렷이 남아, 사라지지 않고 이렇게 때때로 나를 찾아와 숨 쉬고 있다. 아마도 오늘 아침처럼, 또 어떤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문득 나를 찾아와 가만히 말을 걸어오곤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