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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삶은, 저마다의 시(詩)다

by 정성균

하루의 노동이 남긴 익숙한 무게가 어깨를 감싸는 시간, 창밖으로 도시의 불빛들이 점점이 제 몸을 밝히며 인공의 별자리처럼 밤을 수놓습니다. 이른 시간 골목길을 쓸던 빗자루 소리가 아득한 기억 저편으로 물러난 지금, 분주했던 낮의 소음은 잦아들고, 대신 자동차들의 낮은 진동과 창문 너머에서 간간이 새어 나오는 낮은 말소리가 뒤섞여 밤의 공기를 채웁니다. 가만히 숨을 들이쉬면, 아직은 서늘한 기운 속에 섞인 희미한 라일락 향기가 봄밤임을 속삭입니다. 그 불빛 아래 집으로 향하는 사람들의 지친 모습 속에서, 혹은 아직 불 꺼지지 않은 창문 너머 희미한 실루엣 속에서, 저마다 다른 하루가 그만의 속도로 조용히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시작이 그러했듯, 마무리 역시 저마다의 표정을 가집니다.


하루가 시작되던 때, 알베르 카뮈의 시시포스처럼 각자의 바윗돌, 즉 삶의 무게를 밀어 올리기 시작했던 우리는, 이제 그 고된 정상을 넘어선 뒤 잠시 숨을 고릅니다. 하루의 노동을 마치고 셔터를 내리는 상인의 둔탁한 소리 뒤에 남는 정적, 퇴근길 버스 좌석에 몸을 기댄 채 감겨오는 눈꺼풀의 무거움. 그 모든 순간들 속에서 우리는 그들이 온몸으로 버텨냈을 시간의 흔적을 어렴풋이나마 느낍니다. 끝없이 반복될 것 같은 일상이라는 거대한 부조리함 앞에서, 그래도 오늘 하루를 포기하지 않고 묵묵히 완주해 낸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경이롭습니다. 어쩌면 의미는 찾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성실한 반복 속에서 스스로 피어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하루 끝의 피로감 속에서 돌아보는 그 꾸준함이야말로, 특히 노동의 가치를 되새기게 되는 오늘 같은 '근로자의 날'에는 더욱, 삶의 가장 진솔하고 깊은 존엄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가로등 불빛 아래, 낮 동안 단단히 쓰고 있던 페르소나(Persona)라는 사회적 가면을 조금은 느슨하게 풀어놓은 듯한 얼굴들이 스쳐 지나갑니다. 무심해 보이는 표정 속에 언뜻 비치는 안도감, 혹은 아직 마음 한구석에 남아있는 미처 떨치지 못한 고민의 그림자. 이 익명의 인파 속을 걷다 보면 불현듯 '존더(Sonder)'라 불리는, 타인의 삶에 대한 아찔한 자각, 혹은 고요한 연대감이 밀려옵니다. 스쳐 가는 저 모든 이들이 나처럼 복잡하고 생생하며, 때로는 고통스럽기까지 한 삶의 서사를 각자의 내면에 고스란히 품고 있다는 깊은 깨달음. 그것은 서늘하면서도 이상하게 위안이 됩니다. 혹시 나만 힘든 게 아니라는, 그런 얄팍한 안도감은 아닐까 스스로에게 되묻게 되지만. 우리는 서로 모르는 채 지나치지만, 어쩌면 이 도시의 밤 아래 같은 숨을 쉬며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된 섬들 인지도 모릅니다.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의 그림 속 인물들처럼, 때로는 군중 속에 있으면서도 홀로인 듯한 고독감을 느끼며, 환하게 불 켜진 창 안의 익숙한 풍경조차 저마다 말 못 할 사연을 품은 채 이 밤의 일부가 됩니다. 어쩌면 한 사람의 뒷모습은, 그가 짊어지고 가는 우주의 그림자인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저 그 표면의 빛과 그림자, 그 찰나의 인상만을 스치듯 목격할 뿐입니다.


시장의 좌판들은 대부분 덮였고, 왁자하던 낮의 생기 대신 밤의 정적이 내려앉은 거리 위로 제법 선선하지만 봄밤의 기운이 완연한 저녁 바람이 불어옵니다. 하지만 이 시간에도 여전히 누군가는 삶의 현장을 분주히 밝히고 있을 것입니다. 늦은 밤까지 환한 불을 켠 작은 식당 주방의 열기 속에서, 혹은 다시 시작될 야간 근무를 위해 일터로 향하는 무거운 발걸음 속에서. 그들의 어깨 위에는 단순히 오늘의 피로 이상의 것, 어쩌면 가족의 내일에 대한 책임감, 혹은 더 나은 삶을 향한 절박하고도 간절한 희망 같은 것들이 묵직하게 얹혀 있을 겁니다. 마치 깊이 뿌리내린 나무가 모진 비바람 속에서도 묵묵히 자리를 지키며 새잎을 틔울 봄날을 조용히 예비하듯, 매일 마주하는 고단함 속에서도 다시 일어설 힘, 그 끈질긴 회복탄력성(Resilience)이 우리를 결국 살아가게 합니다. 솔직히 말해, 매일 아침 다시 몸을 일으키는 그 힘이 정확히 어디서 오는지 나조차도 잘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그저 관성일지도, 혹은 아주 작은, 내일 아침 창문으로 들어올 햇살 한 줌 같은 희미한 기대 때문일지도. 오늘 하루의 노동으로 닳아진 몸과 마음 위로, 보이지 않는 그 생명력이 더욱 애틋하고 소중하게 느껴지는 시간입니다.


도시의 밤은 그렇게 저마다의 속도로 깊어갑니다. 낮 동안의 치열함이 남긴 열기를 식히며, 사람들은 익숙한 저녁의 풍경 속으로 스며듭니다. 창문마다 새어 나오는 불빛 아래, 누군가는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며 하루의 먼지를 씻어내고, 누군가는 조용한 음악에 기대어 텅 빈 마음을 채우고 있을 테지요. 어쩌면 이 평범하고 반복되는 저녁의 의식들이야말로, 복잡한 세상을 향한 우리 각자의 작지만 단단한 닻일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우리는 매일 밤, 이 소소한 의식들을 통해 하루 동안 부서지고 흩어진 마음의 조각들을 애써 그러모으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내일 다시 나아가기 위해, 잠시 숨을 고르고 자신만의 작은 세계를 다독이는 시간. 그 고요해 보이는 시간 속에 얼마나 많은 생각과 감정들이 소용돌이치고 있을지 우리는 다만 짐작할 뿐입니다.


하루의 소란이 잦아든 지금, 우리는 조금 더 솔직하고 너그러운 시선으로 서로를, 그리고 자신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낮 동안의 역할과 의무라는 갑옷을 잠시 벗어두고, 지친 서로의 어깨를 말없이 다독여주거나 그저 지켜봐 줄 수 있는 시간. 그래서 타인의 삶을 섣불리 재단하거나 평가하기보다, 그저 그 존재 자체를 인정하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계속되고 있을 그만의 분투에 조용한 응원을 보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습니다. 세상 모든 관계의 온기는 아마도 이렇듯 조심스러운 헤아림에서 비롯되는 것일 겁니다. 무심코 던진 말이 누군가의 지친 마음에 돌이킬 수 없는 생채기를 낼 수도 있지만, 마음을 담아 건넨 따뜻한 눈빛과 진심 어린 격려 한마디는 예상치 못한 순간에 누군가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작지만 분명한 기적 같은 힘을 발휘하기도 합니다.


현관문을 열자 "수고하셨어요"라는 다정한 목소리와 함께 아내의 따뜻한 미소가 하루의 피로를 눈 녹듯 녹여주는 순간, 단단한 척 애쓰던 마음의 벽이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는 기분입니다. 이 온기가, 이 평화가 언제까지나 계속될 수 있을까, 하는 어리석고 부질없는 불안감이 문득 고개를 듭니다. 어쩌면 집집마다 창문 너머로 풍겨 나오는 저녁밥 냄새처럼, 이런 소박한 위안들이 고단한 영혼을 다독이며 우리를 살게 하는지도 모릅니다. 그 작은 위안과 함께 익숙한 공간의 불을 켤 때 온몸으로 퍼지는 안도감. 식탁에 마주 앉아 나누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저녁 식사와 함께하는 평범한 대화들. 혼자만의 조용한 시간 속에서 좋아하는 음악을 듣거나, 새 책의 보드라운 종이 질감을 느끼며 글자를 따라가거나, 밤공기가 스민 공원 벤치의 서늘함에 기대 하루를 차분히 갈무리하는 순간들. 이 소박한 저녁의 풍경들은 낮의 숨 가쁜 치열함과는 다른 결을 지닌, 삶의 더없이 소중하고 필수적인 이면입니다. 눈에 띄게 화려하진 않지만, 깊고 진실하며 아름다운 순간들, 스스로에게 건네는 작은 휴식 같은 시간들입니다.


어떤 삶은 밝은 스포트라이트 아래서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으며 화려하게 빛나고, 또 어떤 삶은 저녁의 그늘 아래서 이름 없이 조용히 흘러갑니다. 하지만 빛과 그늘, 화려함과 소박함은 결코 삶의 가치를 나누는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모든 삶은 존재 그 자체만으로 존엄하며, 세상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고유한 빛깔과 무게를 지닌 한 편의 시(詩)입니다. 그 시 안에는 우리가 살아온 시간의 발자취, 수없이 겪어낸 희로애락의 다채로운 감정들, 관계 속에서 배우고 성장하며 맺어온 의미들, 그리고 차곡차곡 쌓여 마침내 한 사람의 역사가 된 무수한 이야기들이 빠짐없이 담겨 있습니다.


하루의 끝에서 돌아보는 오늘. 그리고 밤의 정적 속에서 가만히 귀 기울이는 내일의 희미한 기척. 비록 삶이 버겁고, 외롭고, 또 고단하게 느껴질지라도, 그리고 때로는 그 끝이 어디인지 몰라 막막할지라도, 우리는 밤이 지나면 반드시 아침이 오듯 다시 일어나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만의 새로운 시를 써 내려갈 것입니다. 어둠 속에서 길을 찾듯, 넘어지고 다시 일어서기를 반복하며. 쉬운 길은 아닐 테지만, 이 밤, 부디 당신의 시가 지친 하루의 끝에서 평온한 쉼표를 찾고, 내일은 다시금 희망의 문장으로 힘차게 시작될 수 있기를. 그리고 이 도시의 밤하늘 아래, 나와 당신처럼 수많은 다른 시들이 저마다의 빛을 내며 숨 쉬고 있음을 기억하며, 서로에게 조금 더 따뜻하고 너그러운 연대의 마음을 건넬 수 있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우리의 삶은 모두, 그렇게 이어지고 있으니까요. 저마다의 방식으로, 소중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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