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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자꾸 남을 탓하게 될까?

by 정성균

어느 날 오후, 카페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창밖으로는 나른한 오후의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지만, 두꺼운 유리창은 그 빛마저 여과해 어딘지 모르게 흐릿한 온기만을 남겼다. 평소 좋아하던 자리였는데, 그날따라 창밖 풍경이 조금은 생경(生硬: 눈에 익지 않아서 어색하고 낯선) 하게 느껴졌다. 손에 든 커피잔에서는 유난히 씁쓸한 향이 올라왔다. 마치 그날 내 마음의 상태를 대변하는 듯했다. 무언가 생각을 정리하고 싶어 가방에서 노트를 꺼내 펼쳐놓았지만, 좀처럼 집중하기 어려웠다. 정신은 자꾸만 옆 테이블로 향했다. 옆 테이블에서 나누는 낮은 대화 소리가 굳이 들으려 하지 않아도 귓가에 자꾸만 맴돌았다.


귀에 들어오는 대화 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내용은 또렷하게 전달되었다.


“솔직히 그 사람만 아니었으면 일이 이렇게 꼬이지는 않았을 텐데. 그때 제대로 확인만 했어도…”


말하는 이의 어깨는 조금 처져 있었고, 가끔 긴 한숨이 섞여 나왔다. 그의 목소리에는 억울함과 체념이 뒤섞인 미묘한 떨림이 있었다. 맞은편 사람은 커피잔만 만지작거리며 그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어떤 위로나 조언도 건네지 않았다. 말을 시작한 사람은 멈추지 않고 이야기를 풀어냈다. 복잡하게 얽혔던 당시의 상황 설명부터 시작해, 그때 느꼈던 격한 감정의 파편들, 그리고 가슴 깊이 쌓여 아직도 해소되지 못한 억울함까지. 듣는 이는 아주 가끔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전히 별다른 말을 보태지는 않았다. 두 사람 사이의 공기마저 무겁게 느껴졌다. 그들의 대화가 잠잠해졌을 때, 내 마음 한쪽에는 이유 모를 무거움이 돌덩이처럼 내려앉았다. 단순한 불편함이라기보다는, 마치 내 안의 어떤 묵직한 경험과 공명하는 듯한, 설명하기 어려운 무게감이었다.


왜 우리는 이토록 쉽게 남을 탓하게 되는 걸까. 문제가 생겼을 때, 상황의 본질이나 자신의 역할을 살피기보다 다른 누군가를 원망하는 마음이 먼저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처음부터 우리가 그런 마음을 가지고 태어난 것은 아닐 것이다. 살면서 마주하는 여러 경험과 관계 속에서 내면의 감정 흐름은 조금씩 다른 방향으로 다듬어진다.


어린 시절을 가만히 떠올려보면, 실수를 저질렀을 때 주변의 반응은 대체로 비슷했던 것 같다. 넘어지거나 무언가를 망가뜨렸을 때, 따끔한 시선과 함께 돌아오는 것은 종종 책임 추궁이었다. '네가 조심했어야지', '결국 네 잘못이잖아' 와 같은 말들은 어린 마음에 작은 생채기를 남겼다. 물론 안전을 위해, 혹은 올바른 행동을 가르치기 위한 의도였겠지만, 반복되는 경험 속에서 아이는 점차 '실수=잘못=비난'이라는 공식을 학습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럴 때면 '이건 불공평해', '다시는 이런 기분을 느끼고 싶지 않아' 하는 방어적인 생각이 싹텄다. 어떻게든 그 비난의 중심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절박함이 남 탓이라는 손쉬운 탈출구를 찾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잘못을 인정하는 순간 쏟아질 부정적인 반응을 피하고 싶은 마음, 그것이 자신을 보호하는 가장 빠른 길처럼 느껴졌을 수 있다.


나 역시 그런 경험과 생각의 패턴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직장 생활을 하다 보면 혼자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여러 사람과 얽혀 돌아가는 일들이 많았다. 여러 부서와 협업해야 했던 프로젝트가 예상치 못한 문제로 틀어졌을 때였다. 마감 기한은 다가오고, 책임 소재를 따지는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때 내 마음속에서는 나도 모르게 특정 동료나 다른 팀을 향한 원망의 목소리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그때 그 담당자만 제대로 확인했어도…”, “누가 이것만 제때 처리했어도 상황이 이 지경까지는 안 왔을 텐데…” 이런 식으로 속으로 핑계를 찾으며 중얼거리곤 했다.


누군가를 원망의 대상으로 삼는 순간, 복잡했던 머릿속이 잠시 하얗게 비워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문제의 원인이 외부에 있다고 명확히 선을 그으면, 내 안의 불안과 혼란은 잠시나마 잠잠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문제 해결과는 거리가 멀었다. 잠깐의 심리적 위안일 뿐이었다. 며칠이 지나고 상황이 어찌어찌 마무리된 뒤에도, 가슴 한구석에는 풀리지 않은 응어리가 찝찝하게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미해결된 감정은 비슷한 상황이 다시 닥쳤을 때, 예전의 그 불편한 기억과 뒤섞여 나를 더 예민하고 방어적으로 만들었다. 결국, 남 탓은 당장의 고통을 잠시 잊게 해주는 마취제일 뿐, 근본적인 치유책은 되지 못했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이 끝없는 원망의 순환고리가 나 자신을 조금씩 갉아먹고 있다는 것을 문득 깨닫게 되었다.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마다 내 마음속 문제의 중심에는 언제나 ‘그 사람’ 혹은 ‘그 상황’이 놓여 있었다. 그 패턴을 인식하게 된 것은 어느 하루아침의 일이 아니었다. 반복되는 좌절과 피로감 속에서 문득, 문제의 풍경 속에 언제나 등장하는 '그 사람' 외에, 늘 그 자리에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때 스스로에게 조용히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로 그 사람 때문이었을까? 만약 그 사람이 다른 행동을 했다면, 결과는 완전히 달라졌을까? 그 복잡한 상황 속에서 나의 역할은 전혀 없었을까? 그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었던 다른 선택지는 없었을까?


명확하고 단정적인 답을 내릴 수는 없었다. 세상일이라는 것이 그렇게 간단하게 원인과 결과로 나뉘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기 시작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내 마음의 방향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질문은 처음에는 희미했지만, 점차 내 안에서 깊은 메아리처럼 번져갔다. 외면하고 싶었던 내면의 모습들,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나의 부족함과 마주해야 한다는 약간의 두려움과 함께.


그 질문의 꼬리를 물고 따라가다 보니, 그동안 내가 무엇을 애써 외면하고 있었는지, 무엇으로부터 도망치려 했는지 하나둘씩 희미하게나마 보이기 시작했다. '귀찮음'이라는 이름 뒤에 숨어 책임을 미루던 순간들. 다른 사람의 의견에 기대어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부담을 피하려 했던 모습들. 상황의 전체적인 맥락을 차분히 살피기보다 감정적으로 먼저 반응하던 익숙한 습관들.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기보다는 당장의 불편함에서 벗어나려는 조급함. 그것들을 하나씩 마주하는 일은, 마치 오랫동안 외면했던 내 그림자를 정면으로 보는 것처럼 낯설고 때로는 고통스러웠다. 내 안의 민낯을 들여다보는 일은 결코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그 불편하고 어려운 내면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힘겹게 지나고 나면 마음은 오히려 조금씩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굳이 누군가에게 변명하거나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아도, 내 안에서 무언가가 조용히 정리되는 느낌이었다. 엉망으로 엉켜 있던 실타래가 한 올 한 올 풀려나가는 기분이었다. 문제의 원인 속에서 내 몫을 찾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은 분명 쉽지 않았지만, 그 끝에는 이상한 종류의 해방감이 있었다. 더 이상 남을 탓하며 귀한 감정과 에너지를 소모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복잡하게 얽힌 문제일지라도 내 삶의 문제에 스스로 관여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을 찾아 나설 수 있다는 작은 가능성이 주는 가벼움이었다.


어떤 심리학 책에서는 이런 인간의 행동 경향을 ‘자기보호적 귀인’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괜찮음, 즉 자존감을 지키려는 욕구가 강하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 원인을 외부의 요인, 즉 다른 사람이나 상황 탓으로 돌리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David G. Myers, 『Social Psychology』 참고) 자신을 보호하려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 책의 설명처럼, 우리는 상처받지 않기 위해 보이지 않는 방어막을 치려 한다. 그 마음 자체를 탓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누구나 약해지고 싶지 않고, 스스로를 괜찮은 사람으로 여기고 싶어 하니까.


하지만 그 방어막이 언제나 남을 향한 비난의 화살이 될 때, 문제는 달라진다. 모든 문제의 원인을 습관적으로 외부로만 돌리는 태도는 결국 내 삶의 주체성을 조금씩 잃게 만든다. 내 삶의 방향키를 외적인 요인이나 다른 사람의 손에 스스로 넘겨주는 꼴이 된다. 결국 내 삶은 나의 의지와 선택보다는 외부의 움직임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릴 수밖에 없다.


물론 살아가면서 정말로 억울한 일을 겪을 때도 있다. 내 의도나 잘못과는 전혀 상관없이, 명백하게 다른 사람의 잘못이나 부당한 상황 때문에 힘든 시간을 보내야 하는 경우도 분명히 존재한다. 모든 상황을 무조건 내 탓으로 돌리며 자책할 필요는 절대 없다. 그것은 또 다른 형태의 자기 학대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인생에서 마주하는 크고 작은 모든 어려움과 불편함 앞에서 습관처럼 남을 탓하는 방식으로만 문제를 해석하고 정리하려 든다면, 결국 내 안에 차곡차곡 쌓이는 것은 해결되지 못한 문제의 잔해와 더불어 깊은 분노, 그리고 사라지지 않는 피로감이었다. 반복된 원망은 결국 문제의 본질을 흐리고, 타인과의 관계를 소원하게 만들며, 나아가 스스로의 가능성과 성장을 질식시키는 내면의 족쇄로 작용한다. 마음은 점점 무거워지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는 좁아질 수밖에 없다.


카페에서 들었던 그들의 대화가 유독 내 마음에 무겁게 내려앉았던 이유는, 어쩌면 오래전 나의 모습, 혹은 여전히 내 안에 불쑥 고개를 드는 어떤 부분을 건드렸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남 탓을 하며 잠시 잠깐의 심리적 위안을 얻으려 했던, 하지만 결국에는 더 큰 마음의 짐과 풀리지 않는 문제의 무게를 고스란히 짊어져야 했던 과거의 내가 그들의 대화 속에서 어렴풋이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옆 테이블의 두 사람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카페를 나섰다. 그들의 뒷모습은 유난히 지쳐 보였다. 창밖의 햇살은 여전히 같은 자리를 비추고 있었고, 그들이 남기고 간 테이블 위의 커피잔에는 식어버린 온기만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남겨진 커피잔처럼, 해결되지 않은 문제는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 있을 터였다.


나는 펴두었던 노트를 조용히 덮었다. 그리고 마음속에 한 문장을 가만히 새겨 넣었다. ‘남을 향한 손가락을 거두고 그 손으로 나 자신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순간, 마음은 아주 조금씩, 다른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한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당장 문제가 마법처럼 해결되거나 힘든 상황이 극적으로 바뀌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세상은 복잡하고 때로는 부당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 문제를 대하는 나의 태도가 조금 달라지면,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새로운 장면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같은 풍경 속에서도 다른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는 뜻이다. 문제 앞에서 무력하게 흔들리는 대신, 그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걸음이라도 찾아 내디딜 수 있는 마음의 공간을 확보하는 일이다. 삶의 온도는 그렇게, 아주 조금씩, 외부의 조건이 아니라 내 안의 미세한 변화를 통해 스스로 데워지는 것일 테다. 그 변화는 결코 밖이 아니라, 언제나 내 안에서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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