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한 번쯤은, 어쩌면 그 이상, 발밑이 훅 꺼지는 듯한 아찔함을 경험하곤 한다. 너무나 단단하고 영원할 것만 같던 내 삶의 기반이 속절없이 흔들리는 바로 그 순간. 어제까지 내 손안에 분명히 쥐어져 있다고 믿었던 미래의 약속들이 한순간에 빛바랜 사진처럼 흩어지고, 익숙했던 세상의 소음 대신 먹먹한 정적이 귓가를 채울 때. 그제야 우리는 깨닫는다. 아, 내가 서 있던 곳이 영원한 땅이 아니었구나. 모든 것이 멈춘 듯한 그 텅 빈 공간 속에서,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하는, 길 잃은 아이의 물음만이 동그마니 남겨지곤 하는 것이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눈앞은 온통 짙은 안개 속이다. 어디가 길이고 어디가 낭떠러지인지 분간할 수 없는 혼돈 속에서 발걸음은 쉬이 떨어지지 않는다. 머릿속은 수만 갈래로 엉킨 생각들로 복잡하고, 마음은 쉴 새 없이 밀려드는 파도에 흔들리는 돛단배 신세다. 잠 못 드는 밤이면, 천장에 어른거리는 과거의 그림자들을 보며 ‘만약에…’라는 부질없는 가정을 수없이 반복하게 된다. 그때 다른 길을 택했더라면, 그때 조금만 더 현명했더라면, 아니, 어쩌면 조금 덜 간절했더라면 지금과는 다른 모습일까 하고. 그런 후회와 자책의 시간들은 우리의 발목을 잡고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끌어당기곤 한다. 가슴 한가운데가 시리도록 텅 빈 것 같고, 온몸의 에너지가 모래알처럼 빠져나가 손가락 하나 움직일 기력조차 없는 날들. 세상에 홀로 버려진 듯한 고독감이 엄습하면, 뜨거운 것이 울컥 솟아올라 시야를 흐리기도 한다.
때로는 무심코 들여다본 화면 속, 환하게 웃고 있는 누군가의 시간이 유난히 아프게 다가올 때도 있다. 그들의 반짝임 앞에서 내 삶은 더없이 초라하고 희미하게 느껴진다. 나만 뒤처지고, 나만 실패한 것 같은 조바심과 불안감은 쉬이 가시질 않는다.
더욱 우리를 지치게 하는 건, 이 시간이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일지도 모른다. 괜찮아졌다 싶으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퇴행의 순간들. 어제 겨우 한 뼘쯤 마음이 자란 것 같다가도, 오늘은 속절없이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어버리는 날도 있다. 힘겹게 한 걸음 떼었다 싶으면 어느새 두 걸음 뒤로 밀려나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깊은 무력감에 빠지기도 한다. 마치 벗어나려 발버둥 칠수록 더 깊이 빠져드는 모래늪처럼 느껴질 때, 우리는 '역시 난 안 되나 봐' 하며 너무 쉽게 좌절의 깃발을 들고 싶어진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그렇게 모든 것이 끝났다고 느껴지는 잿빛 폐허 속에서도, 아주 가끔은 뜻밖의 위안을 발견하기도 한다. 잿빛 풍경 속에서 고개 숙여 눈물만 훔치다가, 문득 시선을 들었을 때다. 콘크리트 갈라진 틈새를 비집고 여린 싹을 틔운 이름 모를 풀 한 포기. 혹은 캄캄한 절망의 커튼 사이로 한 줌 스며드는 오후의 햇살 같은 것. 그런 아주 작고 연약한 것들이, 이상하게도 마음 가장 깊은 곳을 가만히 두드릴 때가 있다. 마치 마른 땅 위에 조용히 내리는 단비처럼, ‘괜찮다, 그래도 괜찮다’고 속삭여주는 것만 같다. ‘아, 이렇게 모든 것이 끝나버린 것만은 아니구나.’ 그런 조용한 깨달음은 메마른 마음에 작은 온기를 지펴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마음속을 휘젓던 질문들이 마법처럼 사라지는 건 아니다. 여전히 ‘나는 누구인가?’, ‘내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 시간들은 나에게 무엇을 남길까?’ 하는 쉽지 않은 물음들은 우리 곁을 맴돈다. 어쩌면 평생 안고 가야 할 질문들인지도 모르겠다. 명확한 답을 찾을 수 없다는 사실에 여전히 막막함을 느끼기도 한다. 그럴 때면 오래전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건넸던 말이 위안처럼 다가오곤 한다. 지금은 답을 찾으려 애쓰기보다, 때로는 그 해결되지 않은 질문들 자체를 끌어안고 살아내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서둘러 답을 구하려 조급해하는 대신, 그 질문들을 가슴에 품고 오늘의 삶을 충실히 살아내다 보면, 언젠가 삶이 자연스럽게 그 해답의 풍경 속으로 우리를 데려다줄지도 모른다고. 그러니 지금 당장 답을 모르더라도 너무 자책하지 말자. 잠시 길을 잃었다고 해서 영원히 헤매는 건 아닐 테니까. 넘어진 나를 일으켜 세우기 전에, 우선은 따뜻한 시선으로 ‘애썼다’고, ‘괜찮다’고 스스로의 마음을 토닥여주는 시간이 먼저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홀로 감당하기 너무 버겁게 느껴질 때는, 나와 비슷한 길을 걸었던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보는 건 어떨까. 오래된 책 속의 문장이든, 마음을 알아주는 이의 따뜻한 음성이든, 혹은 같은 아픔을 겪어낸 이들의 진솔한 경험담이든. ‘아, 나 혼자만 겪는 일이 아니었구나’ 하는 연결의 느낌은, 차갑게 얼어붙었던 마음에 온기를 전해주고 다시 숨 쉴 용기를 주기도 하니까.
다시 시작한다는 건, 어쩌면 요란한 구호나 완벽한 계획과는 거리가 멀지도 모른다. 오히려 아주 작고, 소박하고, 때로는 남들 눈에 띄지 않는 그런 움직임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온몸이 납덩이처럼 무겁고, 이불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고 싶지 않은 날이라도, 억지로라도 일어나 창문을 열고 밤새 탁해진 공기를 환기시키는 일. 혹은 오랫동안 먼지만 쌓여가던 책 한 권을 펼쳐 단 몇 줄이라도 읽어보는 일. 좋아하는 음악을 틀고 가만히 그 선율에 귀 기울여보는 시간. 향긋한 차 한 잔을 천천히 음미하며 몸과 마음을 이완시키는 순간. 어쩌면 아주 오랫동안 망설였던 안부 전화를 용기 내어 걸어보는 것일 수도 있다. 이런 지극히 사소한 행동들이 당장 무엇을 바꿔줄까 싶지만, (솔직히 말하면, ‘이런다고 뭐가 달라져?’ 하는 냉소적인 목소리가 속에서 불쑥 올라와 코웃음 칠 때도 많았다.) 그럼에도 신기하게도 그런 작은 시도들이 굳어 있던 몸과 마음에 조금씩 생기를 불어넣는다. 매일의 작은 성취들이 모이고 쌓여, 어느덧 ‘나도 무언가를 할 수 있구나’ 하는 작은 자신감을 심어주고, 다시 앞으로 나아갈 최소한의 에너지를 만들어준다. 그렇게 한 걸음, 또 한 걸음. 비록 더디고 때로는 비틀거릴지라도, 멈추지 않고 내딛는 그 작은 발걸음들 속에서 우리는 서서히 자신만의 리듬과 방향을 되찾아가게 된다. 무엇이 나에게 진정 힘을 주는지, 무엇이 더 이상 나에게 필요 없는지를 몸과 마음으로 알아차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 마치 안개가 걷히고 시야가 트이는 것처럼,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지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내가 겪은 이 무너짐과 상실을 ‘실패’나 ‘끝’이라는 말로만 가두지 않게 된 건, 그 안에서 비로소 내 삶의 본질을 마주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시간이 멈춘 듯한 고요 속에서, 진정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천천히 떠올랐고, 미처 알지 못했던 내 안의 단단한 힘도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어쩌면 이 모든 흔들림은 나를 더 깊고 진실한 모습으로 이끄는 길목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떤 사건을 겪었느냐보다 중요한 것은, 그 경험을 통해 내가 무엇을 배우고 어떻게 성장하느냐는 깨달음. 내 안의 깊은 곳에서 조용히 빛나고 있던 작은 불씨를 비로소 바라보게 되었다. 세상의 바람이 차갑게 몰아쳐도, 그 미약한 빛을 지켜낼 수 있다면, 우리는 어떤 어둠 속에서도 스스로의 길을 밝혀 나아갈 수 있다는 고요한 확신이 마음속에 자리 잡는다.
이렇게 상처와 눈물을 거름 삼아 다시 피어나는 삶의 이야기는, 이전과는 확실히 다른 향기와 빛깔을 품게 마련이다. 어쩌면 이전보다 덜 화려하고 속도도 더딜지 모른다. 하지만 그 자리에는 쉽게 부서지지 않는 단단함, 작은 것들에 감사할 줄 아는 겸손함, 타인의 고통에 기꺼이 함께 아파할 줄 아는 깊어진 마음 같은 것들이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마치 모진 풍파를 견뎌낸 나무의 나이테가 더 촘촘하고 단단해지듯, 우리의 영혼도 시련의 시간을 통해 더욱 깊어지고 성숙해지는 건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렇다고 매 순간 감사와 평화만이 가득한 건 절대 아니다. 여전히 사소한 일에 발끈하고, 예전의 못난 모습이 불쑥 튀어나와 스스로에게 적잖이 실망하는 날도 허다하다.) 그렇게 조금 달라진 눈으로 세상을 보면, 예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소중한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여전히 삶은 예측 불가능하고 때로는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겠지만, 이제는 그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흔들리기보다, 조금은 더 의연하게, 그리고 어쩌면 약간의 설렘과 호기심을 가지고 새로운 시작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테니까.
혹시 지금, 길의 끝처럼 느껴지는 어둠 속에 홀로 서 있다면, 부디 너무 오래 좌절하거나 외로워하지 않기를. 당신이 겪고 있는 그 막막함과 눈물은 결코 당신을 파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당신의 이야기를 더욱 깊고 특별하게 만들기 위한 삶의 숨겨진 초대장일지도 모른다. 상처받고 넘어지고 다시 일어서기를 반복하며 써 내려간 당신의 이야기는, 그 어떤 매끄럽고 완벽한 이야기보다 훨씬 더 큰 힘과 울림으로 당신 자신과 세상을 감동시킬 것이다. 자, 이제 당신의 손에는 새로운 이야기를 써 내려갈 펜이 쥐어져 있다. 때로는 두렵고 망설여질지라도, 당신 안에 있는 그 작은 빛과 용기를 믿어보자. 당신만의 고유한 리듬과 목소리로, 세상에 단 하나뿐인 당신의 다음 이야기를 한 걸음 한 걸음 소중하게 펼쳐나가기를. 그 눈부신 여정을 온 마음 다해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