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의 글이 오늘의 나를 바꾼다
축축한 하늘이 짓눌린 듯 낮게 드리워진 새벽, 곧 빗방울이 후드득 창문을 두드릴 것만 같았습니다.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던 저는 문득 책상 서랍 깊숙이 넣어두었던 오래된 노트를 꺼냈습니다. 바랜 종이 위에는 몇 해 전, 스쳐 지나갔던 어느 날의 감정을 붙잡아 두었던 짧은 문장들이 고요히 남아 있었고, 그 아래에는 마치 저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 텅 빈 여백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무엇을 써야 할지 명확한 생각은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저 손에 쥔 펜 끝이 제 마음을 대신해 무언가를 흘려보내고 싶어 했습니다. 논리적인 흐름이나 완벽한 문장이 아니어도 괜찮았습니다. 습관처럼, 오늘도 그 빈칸에 한 줄의 문장을 적어 내려갔습니다.
살다 보면 그런 날들이 찾아오곤 합니다. 마음은 복잡하게 엉켜 실타래처럼 풀리지 않고, 해야 할 일들은 산더미처럼 쌓여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막막한 순간. 누구에게도 속 시원히 털어놓고 싶지 않고, 애써 이야기해 봐야 제대로 전달될 것 같지 않은 그런 답답한 때. 그럴 때 저는 어김없이 글을 꺼내듭니다. 헝클어진 마음의 매듭을 한 글자씩 따라가다 보면, 신기하게도 어느새 제자리를 찾게 되는 경험을 하곤 합니다.
처음 글을 쓸 때는 그저 흩어진 단어들만이 흘러나왔습니다. 완벽한 문장도, 문장 사이 연결이 느슨한 채로 그저 감정이 이끄는 대로 손을 움직였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그 서툴고 엉성한 글자들 사이에는 제 마음의 풍경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습니다.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생각들은 머무르지 않지만, 손끝으로 써 내려간 글은 그 찰나의 감정을 조용히 머금고 있었습니다. 잊었다고 생각했던 감정들이 문장 속에서 다시 생생하게 피어나고, 희미해졌던 기억들이 뚜렷한 모습으로 되살아납니다.
글을 쓰다 보면 문득 제가 어떤 사람인지, 어렴풋이 그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평소에는 무심히 흘려보냈던 말들, 바쁘다는 핑계로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했던 감정들이 글 속에서는 낯설 만큼 선명하게 다가옵니다. 왜 그런 말을 내뱉었는지, 왜 그런 슬픈 눈빛을 보냈는지, 글로 찬찬히 적어 내려가다 보면 비로소 그 이유를 깨닫게 됩니다. 얼굴이 화끈거릴 만큼 민망했던 순간도, 소소하지만 마음을 따뜻하게 채워주었던 기쁨의 순간도 모두 그 단어들 사이에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그렇게 무심히 흘러나온 마음의 조각들이 쌓이고 쌓여, 지금의 저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마음속 깊이 감춰두었던, 차마 입 밖으로 꺼내기 어려웠던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글로 옮긴 적이 있습니다. 혹여나 날카로운 모서리 때문에 누군가 상처 입지는 않을까, 몇 번이고 문장을 고쳐 쓰며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이어갔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쓰고 나서야 비로소 알았습니다. 글은 감정을 조용히 담아내고, 어느새 굳게 닫혀 있던 제 마음의 문을 열어주곤 했습니다. 아무에게도 꺼내지 못했던 말들이 글을 통해 조금씩 흘러나왔고, 멀게만 느껴졌던 내면의 풍경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글을 쓰는 일은 자연스럽게 저만의 조용한 연습이 됩니다. 숙련된 목수는 나무를 손에 쥐었을 때 나뭇결의 흐름을 읽어냅니다. 손끝으로 나무의 두께를 가늠하고, 섬세한 감각으로 나무가 자라온 방향을 감지합니다. 처음에는 도면을 펼치고 정해진 숫자를 꼼꼼히 확인하며 조심스럽게 작업을 시작했겠지만, 시간이 흐르고 경험이 쌓이면 어느새 손이 먼저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나무가 원하는 방향을 손이 본능적으로 알아채고, 망설임 없이 알맞은 도구를 선택합니다. 글 쓰는 과정도 이와 닮았습니다. 처음에는 어색하고 더디기만 했던 문장들이 어느 순간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손끝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합니다.
제가 쓴 글은 고스란히 저를 닮아 있습니다. 하나의 문장 안에는 그날의 기분이 희미하게 녹아 있고, 선택된 단어들 사이에는 저만의 고유한 호흡이 숨 쉬고 있습니다. 매일 꾸준히 써 내려가는 글은 어느새 제 삶의 은은한 리듬이 됩니다. 특정한 거창한 목적이 없더라도, 매일의 글쓰기는 저를 조금씩 다듬고 성장시키는 소중한 습관이 됩니다.
반복되는 행위는 놀라운 깊이를 만들어냅니다. 익숙해질수록 마음의 근육은 단단해지고, 흔들리지 않는 중심을 갖게 됩니다. 글쓰기는 조용히 손끝에 스며들어 마음속 깊은 곳에 흔들림 없는 자리를 잡습니다. 어느덧 글을 쓰는 행위는 저 스스로를 돌보고 위로하는 가장 조용하고 섬세한 방식이 됩니다.
무언가를 진정으로 이해했다면, 다른 사람에게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글쓰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써 내려가는 문장들은, 때로는 서툰 제 자신에게 끊임없이 되뇌는 설명과 같습니다. 때로는 마치 오랜 친구에게 이야기하듯 편안하게 적어보기도 합니다. 신기하게도 그렇게 써 내려간 문장들은 조금 더 따뜻하고 다정해지고, 글을 쓰는 저 역시 그 온기에 물들어 한결 부드러워지는 것을 느낍니다. 혼자 조용한 방 안에서 글을 쓰다 보면, 복잡하게 얽혀 있던 감정들이 바깥으로 천천히 흘러나옵니다. 제대로 정리되지 않았던 생각의 파편들이 차곡차곡 쌓여, 마침내 문장이라는 견고한 틀 안에서 비로소 하나의 의미 있는 흐름을 갖게 됩니다. 바로 그 순간, 저는 비로소 진정한 저와 마주하게 됩니다.
삶은 늘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버겁게 느껴지는 순간도 찾아옵니다. 평소에는 아무렇지 않게 넘겼던 작은 일들이 어떤 날에는 거대한 파도처럼 밀려들기도 합니다. 그런 날이면 저는 익숙한 향기나 오래된 사진을 찾듯, 습관처럼 글을 붙듭니다. 단 한 줄의 짧은 문장이 따뜻한 위로가 되어 굳게 닫힌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그 문장 속에 담긴 기억들이 지나간 시절의 저를 조용히 불러내기도 합니다. 글은 저를 잠시 멈춰 서게 하고, 다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작은 용기를 건넵니다.
우리는 과거의 기억을 통해 배우고, 그 배움을 바탕으로 현재를 살아가며 미래를 만들어갑니다. 글은 바로 그 지난한 과정을 고스란히, 그리고 천천히 따라갑니다. 오늘 무심코 적어 내려간 단 하나의 문장이 내일의 지친 나에게 뜻밖의 위로를 건넬 수도 있고, 잊고 지냈던 행복한 순간을 떠올리게 하며 잔잔한 미소를 선사할 수도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매일의 글쓰기가 조금씩이나마 저를 변화시키고 성장시킨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저는 펜을 듭니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금세 잊힐지도 모르는 소중한 감정들을 붙잡아두고, 오랫동안 기억하기 위해서. 삶이라는 배움의 여정에는 정해진 시험지나 종착역은 없을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배우는 이유는 결국 조금 더 나은 자신이 되기 위해서이고, 그 깨달음의 순간들을 글로 기록할 때 우리는 비로소 삶의 의미를 조심스럽게 더듬어 찾아 나갑니다. 문득 찾아온 작은 깨달음은 종종 글을 쓰는 행위를 통해 더욱 선명해지고, 그렇게 적힌 문장들은 언젠가 소중한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건네고 싶어지는 따뜻한 마음이 됩니다.
오래된 노트를 조심스럽게 펼치는 행위는 마치 조심스럽게 마음의 문을 여는 것과 닮았습니다. 어떤 날에는 페이지를 채우기도 전에 환한 웃음이 먼저 스며들고, 어떤 날에는 꾹꾹 눌러쓴 글자들 사이로 문득 목이 메기도 합니다. 참 이상하게도, 마음이 복잡하고 혼란스러울수록 더욱 자주 펜을 들게 됩니다. 마치 거친 파도가 몰아칠 때 닻을 내리듯, 마음이 심하게 흔들릴수록 글은 그 불안한 흔들림을 붙잡아주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줍니다. 노트 한 귀퉁이에는 무겁고 어두운 마음의 그림자가 고스란히 남아 있지만, 신기하게도 그 희미한 흔적들이 결국에는 저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꿋꿋한 힘이 되어줍니다. 가끔은 글을 쓰다 말고 문득 노트를 덮고 창밖의 풍경을 멍하니 바라봅니다. 글을 쓴다고 해서 당장 눈앞의 현실이 드라마틱하게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신중하게 단어를 고르고, 서툰 문장을 짓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복잡하게 얽혀 있던 마음의 결이 조금씩 달라지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던 생각들은 한층 더 깊고 다층적으로 정리됩니다. 어색한 한 줄의 문장을 간신히 쓰고 나면, 신기하게도 이전과는 미묘하게 다른 제가 그곳에 존재합니다.
제가 쓴 모든 글을 소중하게 간직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날은 빼곡하게 채운 페이지를 미련 없이 찢어버리기도 합니다. 잉크의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진 그 종잇조각들처럼, 복잡했던 마음의 매듭이 한결 가벼워졌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하지만 유난히 맑고 환한 기분이 고스란히 담긴 글들은 왠지 모르게 곁에 오래도록 두고 싶습니다. 언젠가 시간이 흘러 다시 그 글들을 꺼내 읽었을 때, 그날의 순수했던 제가 지금의 지친 저에게 따뜻한 위로와 격려의 말을 건네줄지도 모른다는 작은 기대를 품기 때문입니다.
글을 쓰면서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이 하나 있습니다. 복잡하게 얽힌 마음은 억지로 붙잡고 애쓰지 않아도, 신기하게도 글이라는 도구를 통해 자연스럽게 나아갈 길을 찾아낸다는 것입니다. 굳이 생각을 숨기려 애쓰지 않아도 되고, 격렬하게 요동치는 감정을 억지로 억누르려 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저 마음이 이끄는 대로, 쓰고 싶은 만큼만 솔직하게 써 내려가도 충분합니다. 그러다 보면 문득, 제 마음이 지금 어느 방향을 향하고 있는지, 무엇을 갈망하고 있는지 명확하게 깨닫게 되는 놀라운 순간이 찾아옵니다.
사람은 자신이 자주 사용하는 말투로 세상을 바라보고, 익숙한 문장으로 자신을 기억한다고 합니다. 그렇기에 어떤 단어를 신중하게 선택하느냐는 단순한 습관을 넘어, 세상을 살아가는 자신만의 고유한 태도를 반영하는 것입니다. 글쓰기는 바로 그런 의미에서,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자신을 빚어가는 가장 조용하고 강력한 도구입니다.
숨 막힐 듯 답답한 날에는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떠오르는 대로 솔직하게 적어보는 것은 어떨까요. 완벽하고 멋진 글이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단 한 줄의 문장이면 충분합니다. 그 한 줄의 문장이 지친 나를 가만히 다독여주고, 먼 훗날의 막막한 나를 따뜻하게 이끌어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무심히 남겨진 문장들이, 결국에는 지금의 나를 만든 가장 소중한 조각들이 될 것입니다.
언젠가 시간이 흘러 다시 이 오래된 노트를 무심히 펼쳐보게 될 것입니다. 그때의 저는, 지금과는 또 다른 새로운 마음을 품고 살아갈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 놀라운 변화는, 분명 매일 밤 조용히 써 내려갔던 그 서툰 글들 덕분이었을 것입니다. 내일도, 부디 조용히 저를 다듬어가는 그 단 한 줄의 문장을 쓸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봅니다.